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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Apr 15. 2020

아들! 건투를 빈다

1일 1글 시즌4 [episode 17]

스무 살 된 아들이 생애 첫 투표를 했다.


투표를 하고 난 후 엄지에 도장을 찍고 나와 투표소 앞에서 엄지를 치켜들고 인증샷을 찍자고 했다.

아들은 엄지나 브이 같이 숫자를 형상화하는 손 모양으로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또 손 등에도 도장을 찍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 말이 맞다 하면서 투표소 안내판 앞에서 마스크를 쓰고 증명사진 찍듯 인증샷을 찍었다.


두 달간 집에서 칩거하던 아들과 나는 머리가 어느새 장발이 되어버렸고 아들의 온라인 수업이 없는 틈을 타 투표 후 조심 스래 미용실을 방문하기로 했다. 십여 년간 머리를 만져준 헤어 디자이너께서 한 시간 거리의 김포로 이전을 한 바람에 아들과 나는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을 이동해야 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전동차에 몸을 실으며 아들에게 첫 투표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뭔지 가슴이 뭉클하거나 그런 느낌이 없었는지 물었더니, 그런 느낌은 없었지만 뭔가 대단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 인상적이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 누굴 찍었는지에 대해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집으로 온 선거 홍보물을 바닥에 늘어놓고 함께 살펴보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어느 정도 합의를 본 부분이 있지만 아들과 나는 서로의 결정에 대해 확인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투표소를 나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막 성인으로 세상에 발을 딛는 아들,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이 세상의 수많은 아들과 딸들이 잘 사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희망해본다. 더 이상 '헬조선'이란 말로 아이들스스로를 지옥에 가두지 않기를, 정치적 성향이 다를 수 있지만 그 다름이 서로의 인격과 삶 자체를 폄하하는 도구가 되지 않기를, 국민의 목소리가 자신들을 뽑아준 정치인들의 귀에 쓴 약이 되기를 바란다.


돌아오는 전동차 안에서 덩치가 산만한 아들이 꾸벅꾸벅 졸다가 나에게 기대어 잠이 들었다. 성인이 된 아들이지 내겐 여전히 어리고 여린 아들, 가끔은 엄마에게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는 아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이야기한다. "아들아! 네가 살아가야 할 나라에 너의 공식적인 권리를 처음 행사하며 세상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뎠구나. 지금까지는 엄마의 어깨에 기대 잠잘 수 있었지만 사실 인생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하는 란다. 아들! 건투를 빈다"


덜컹덜컹... 한강을 건너는 전동차가 석양으로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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