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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Apr 16. 2020

블랙 윙과 포루투갈제 푸른 노트

1일 1글 시즌4 [episode 18]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신에게만 의미있는 행동들이 있다. 운동선수들이 일명 루틴이라 부르는 것들인데, 작가들이나 예술가들 또한 자신만의 루틴을 가지고 있다. 


미국 시인 오든은 글을 쓰기 전 커피를 끓였고, 하루키는 글을 쓰고 나서 수영과 달리기를 했다. 

스티븐 킹은 차 한잔과 비타민 한 알을 먹고 매일 같은 음악을 틀어놓고 글쓰기를 시작했으며,  김연아는 시합 전 경기장을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돈 후 뒤로 서서 S자를 그리며 활주하는 것으로 몸을 풀었다. 


미대 입시를 위해 화실을 다닐 때 나의 루틴은 연필을 깎는 것이었다. 그림을 시작하기 전이나 그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잠깐의 휴식이 필요할 때 나는 연필을 깎았다. 80년대 미대 입시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공통과목은 석고데생, 전공에 따라서 선택 실기가 달랐다. 


우리가 공부할 때 썼던 연필이 HB라면  데생을 할 때는 4B연필을 쓴다. 그렇지만 연필이 HB와 4B만 있는 것은 아니다. H는 단단한 정도를, B는 검은 정도를 나타내는 표시인데 연필심의 재료인 흑연과 점토를 1:1로 섞은 것이 HB다. 이 HB를 기준으로 B의 숫자가 높아질수록 흑연의 비율이 높아진다. 때문에 연필심이 무르고 진해지고 H의 숫자가 높아질수록 점토의 비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연필심이 단단하고 색깔이 연해진다.  사진에서 보듯 9H와 9B는 연필심의 단단함과 검은 정도의 차이가 크다. 이 중 4B 연필이 데생용 연필로 많이 쓰이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 6B나 7B 등을 함께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B의 숫자가 높아질수록 다루기 어렵지만 풍부한 색감과 깊은 맛을 낸다. 

Stadtler의 연필 종류 



미대 입시를 준비하며 화실을 다녔던 4년간 과연 몇 자루의 연필을 썼을까? 긴 시간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그 때 연필을 깎던 그 느낌이 생생하다.  감수성 예민한 10대의 내게 있어 연필을 깎는 순간은 일종의 의식이자 꿈을 꾸는 시간, 바람을 염원하는 시간, 답답함과 모호함으로부터 잠시 달아나는 시간이었고 그 짧고 강력한 행동은 나의 기억 저 아래에 깊게 새겨진 문신처럼 남아있다.  


그런데 오늘 교보문고에 들렀다가 오래전부터 갖고 싶었던 '팔로미노 블랙 윙'을 발견했다. 미대를 졸업한 이후 이제는 거의 기웃거리지 않는 화방 코너를 지나가다 그 당시 사용했던 톰보 연필 진열대 아래쪽에 놓여 있던 것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헤밍웨이가 사용했던 연필로 유명세를 탔고 1990년대 생산이 중단되자 연필이 한 자루 가격이 3-40달러까지 치솟았던 팔로미노 블랙윙. 이후 2010년도에 다시 생산이 재개되어 글 쓰는 사람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자 연필계의 샤넬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연필을 사본 게 얼마만인가? 아이가 학교 다닐 때 문방구에서 사준 어린이용 연필을 제외하곤 처음인 것 같다. 노트북 자판 두들기는 게 익숙하다가도 그 사각사각하는 연필의 감촉이 가끔 그리워질 때가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그만 블랙 윙과 눈이 맞아버렸다. 한 다스를 사고 싶었지만 또 얼마나 쓸까 하는 마음에 602와 pearl 두 자루만을 사가지고 왔다.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블랙윙을 바라보며 존 스타인백이 이야기한 것처럼 종이 위에서 활강하듯 날아가는 블랙 윙이 내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까지 꺼내와 종이 위에서 우아하게 춤추기를 기대해본다. 


아! 폴 오스터의 소설 '신탁의 밤'에 등장하는 포루투갈제 푸른 노트와 함께라면 블랙 윙은 그야말로 팔로미나가 날개 달린 유니콘이 되어 날아가버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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