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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Apr 23. 2020

뭉툭해지기

1일 1글 시즌4 [episode 25]

illust by NanJoo

표지가 빳빳한 스프링 노트를 가지고 다닌다. 웬만한 공책보다 사이즈가 조금 큰 노트는 외형이 흐물흐물한 주머니형 가방의 모양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서 빠트리지 않고 챙겨 다닌다. 노트의 왼편에 돌돌 말린 스프링이 만들어내는 터널 같은 공간에 연필을 집어넣는다. 팔로미노 블랙 윙의 끝에 달린 지우개가 스프링의 끝에 걸려 마치 셔츠 주머니에 꽂힌 만년필마냥 안정되게 수납된다.


나는 구입하지 않았지만 블랙 윙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전용 샤프너를 함께 구입하기도 한다. 일명 연필 깎기다. 성냥갑만 한 크기에 연필을 꽂는 구멍이 두 개인데 하나는 연필의 나무 부분을 깎는 곳, 하나는 연필심을 뾰족하게 갈아주는 곳이다. 연필의 몸체를 이루는 나무의 품질이 좋아 샤프너를 사용해 연필을 깎을 때의 손맛이 아주 좋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칼로 직접 깎는 것이 좋다. 목수가 대패질을 하듯, 주방장이 회를 뜨듯 나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연필을 깎는다. 칼이 밀고 지나가는 곳에서 동그랗게 말려 떨어지는 나무의 조각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다. 연필을 돌려가며 연필심이 적당한 길이로 드러나도록 균형을 잡는다.


나는 연필을 깎을 때마다 미켈란젤로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는 대리석으로 조각을 할 때마다 그 돌덩이 안에 이미 작품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끄집어내기 위해 자신은 불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내는 것이라고.


연필은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연필 자루 끝에서 완만한 기울기의 원뿔 형태로 모여지며 마침내 말레피센트같은 냉정하고 고고한 흑심을 드러낸다. 연필심을 연마할 차례다. 연필을 비스듬하게 세워 연필심 부분을 연마하는 일은 힘이 너무 들어가서도 너무 빠져서도 안된다. 마치 계란을 쥐듯 연필을 부드럽게 잡아 돌리며 한 방향만으로 치우친 모양이 되지 않도록 균형감 있게 갈아주어야 한다.


그런데, 날카롭게 잘 갈린 연필을 써본 사람들은 잘 안다. 그 가냘프고 뾰족한 연필심은 자칫 힘을 잘못주었다간 투투툭하고 작은 조각으로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갖은 정성을 다해 갈아놓은 뾰족한 연필심은 가느다랗고 날렵하게 종이 위에 자국을 내보기도 전에 하얀 종이를 얼룩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은 정신 차리고 똑똑하게 살아야지'라고 다짐한다. '이 세상 사람들 어느 누구도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은 없어. 다 자기 좋으라고 하는 일이지. 그러니 절대 손해 보는 일은 하지 말자'라고 자신을 다그친다. 잔뜩 날카롭게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과 나의 감정을 벼리고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그 뾰족한 다짐은 나를 겨냥한다. 투투툭하고 마음 한 귀퉁이가 부서져 떨어진다.


연필은 너무 뾰족할 때 보다 조금 뭉툭해졌을 때 힘들지 않게 써진다. 그러므로 뭉툭한 연필심이야말로 연필이 본래 가지려 했던 모습일지 모른다. 김연아 선수가 얼음판 위를 유영하듯, 조성진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어루만지듯, 나의 마음도 조금 뭉툭해졌을 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오가며 공명할 수 있다.


뭉툭한 마음은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 둥그렇게 벼린 마음의 모양인 것이다.





난주샘~ 그림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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