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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Apr 26. 2020

엄마에겐 엄마가 없었지만 지금 나에겐 엄마가 있다.

1일 1글 시즌4  [episode 28]

요즘 나의 상태가 무기력이라는 것을 책 '문제는 무기력이다'를 보고 알았다. 장장 두 페이지에 걸쳐 딱 나의 상태를 표현해놓은 듯한 부분이 있어 한편으론 놀라고 또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책에 소개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겪는 증상이라는 데서 오는 일종의 동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동질감이 주는 안도는 아주 잠시 내 마음에 머물렀을 뿐, 줄줄이 나열된 무기력의 사례들은 오랫동안 나의 자괴감의 원인이 되었던 행동들이었기에 나는 어떻게든 빨리 문제의 해결방법을 찾고 싶어 속독하듯 빠르게 글줄을 훑어 내려갔다. 


그러나 저자는 아주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련의 행동들은 모두 무기력이 원인이다. 무기력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어린 시절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나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경험이 쌓여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물론 나이가 들어 경험한 비슷한 상황들이 급성적 무기력 상태를 만들기도 한다. 무기력한 사람들의 특징은 이러이러하다. 그러나 그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막을 건너는 일과 같다. 


하...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무기력한 사람이구나라는 확인만 한다. 그래도 저자의 한마디 한마디는 나에게 굉장한 권위로 다가와 중간 부분을 휘리릭 건너뛰어 문제의 해결방법을 먼저 보고 싶지 않았다. 차근차근 저자의 속도에 맞춰 한 걸음씩 걷기로 했다. 이미 무기력을 벗어나는 방법은 거대한 사막을 벗어나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았나. 지치고 목마르고 얼른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이미 책을 읽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성인의 내면을 다루는 많은 책들의 단골 소재는 바로 '내면 아이'다. 외형상으로는 성인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 무엇에든 충족하지 못한 어린 자아가 나의 내면에 있고, 그 내면 아이가 나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내면 아이는 나의 기억을 넘어 무의식에 담겨있는 수준까지를 포함한단다. 이쯤 되면 내가 스스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나의 행동과 심리는 나를 양육했던 엄마와 할머니의 책임으로 전가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어릴 적 엄마는 무서웠고, 서울 사는 엄마 아빠를 떠나 할머니와 부산에 잠깐 살았었다. 아버지는 항상 바빠 집에 계신 적이 별로 없었고, 우리 집은 항상 친척들이 잠시 살고 떠나고 했기에 많은 어른들을 만나야 했었다. 언젠가 엄마가 음식점을 차린다고 했을 때, 나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엄마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이 줄어든다는 생각에 무척 기뻤었다. 할머니와 엄마는 고부갈등으로 항상 대립했었고 가끔씩 목격했던 엄마 아빠와의 싸움은 어린 내게 두렵고 혼란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무기력이 어린 시절의 어떤 경험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에 어떤 이유가 들어있는 건 아닐까? 어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엄청난 고통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에 생각을 물고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 울리는 소리


'카톡!' 


친정집에 같이 가기로 한 동생이 나를 데리러 출발한다는 메시지다. 한 시간 남짓 차를 타고 가며 내 동생의 어린 시절 기억을 물어볼까 했으나 하지 않았다. 그냥 나 스스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어서였다. 한 시간이 걸려 도착한 친정집엔 동생이 먹고 싶다던 아빠표 김밥이 큰 접시 두 개에 담겨 있었고, 엄마는 새벽에 뒷산에 올라가 여리고 고운 쑥을 뜯어와 내가 좋아하는 쑥국을 끓여 놓았다. 민들레 김치와 오이소박이, 과일을 갈아 넣어 감칠맛이 나는 총각김치, 동생이 좋아하는 콩나물 잡채며 그야말로 엄마표 집밥의 향연이다. 아! 엄밀히 말하자면 엄마 아빠표 집밥이다. 


밥을 먹고 난 후 아빠는 "커피 마실래?", "사과 줄까?" 하며 끊임없이 우리를 챙기셨고, 그 사이 엄마는 우리 주려고 담가놓은 김치와 갖은 반찬들을 담고 있다. 50대의 두 딸을 위해 똑같이 나누어 담아놓은 주머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기어이 차가 출발하는 모습을 보시겠다며 주차장까지 나오셔서 "운전 조심해라. 천천히 가라"는 당부를 하신다. 


집에 돌아와 엄마가 챙겨준 주머니에서 총각김치와 물김치, 오이소박이, 민들레 김치를 꺼내 김치통에 담는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지금 나의 무기력이 엄마의 양육방식에서 나왔건, 할머니의 양육방식에서 나왔건 그게 뭔 상관이란 말인가? 엄마가 나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엄마도 그때는 어렸고, 엄마도 엄마를 처음 해봤을 거다. 엄마도 어쩜 무기력한 많은 순간을 경험했었을 거다.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그때 울 엄마에게는 엄마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무기력하다고 징징대는 나에게는 엄마가 있다. 이거면 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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