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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21. 2020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1일 1글 시즌4 [episode 53]필사노트; 호모쿵푸스,고미숙


고미숙 선생의 <호모 쿵푸스>는 13년전에 구입한 책인데 수차례의 이사와 책정리의 폭풍속에서 살아남은 책이다. 언제든 꺼내어 아무 페이지나 읽어 보아도 행간의 깊고 넓은 의미가 매번 새롭게 다가온다. 오랜만에 필사




앎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천지에 떠도는 정보의 흐름, 혹은 우주적 비의 혹은 말의 길을 특정한 방식으로 '절단, 채취'한 것이다. 그것은 한 개별 주체의 두뇌에서 나오는 산물이 아니다. 두뇌들의 네트워크, 그리고 아주 특별한 집합적 관계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전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몸은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하나의 르는 사건이다."(앨런 와츠, <물질과 생명>) 마찬가지로, 지식 또한 사건의 흐름이 뿐이고 따라서 끊임없는 순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행복해지기 위해 어린아이에게 더 기다리라고, 노인에게 이미 지나갔다고, 노예나 매춘부에게 포기하라고 말해선 안된다.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 공부 또한 그러하다. 공부하면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고, 뭔가를 얻게 될 거라고 말해선 안 된다. 공부하는 그 순간, 공부와 공부 사이에 있다는 것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자 이유여야 한다. 고로 공부는 존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책을 읽어야 우주적 존재가 될 수 있다. 이건 불변의 진리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하다보면 또 한번의 비약이 일어난다. 즉, 언어와 문자의 경계를 넘어 세상 모든 것이 '책'이 되는 경이를 체험하게 된다. 그야말로 문자와 몸의 세계가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 "앎은 행위에서 시작되고, 행위는 앎의 완성"(왕양명)이 되는 '지행합일'의 경지, 이것이 바로 고전의 학인들이 지향했던 공부의 진경이다. 그렇다고 그때부터 책을 놓아버리는가? 천만에! 멀리 갈것도 없이 우리 시대 최고의 스승이신 달라이 라마만 해도 일과의 대부분이 공부하고 강의하고 책을 쓰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런 경지에 도달하면, 생사는 말할 것도 없고 존재와 일상, 감정, 심지어 호흡까지도 다 공부의 자원이 된다.  

불행히도 근대 지식은 이런 역동성과 충만감을 다 잃어버렸다. 근대 지식은 지식의 주체도,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도, 그 누구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앎이 일상과 분리되면서 외부와의 소통을 거절한 대가다. 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을로써 가장 먼저 몸과 분리되었고, 그와 동시에 삶과 분리되었다. 그 결과 공부는 한없이 협소한 저눈 영역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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