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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23. 2020

내가 누구인지 나에게 말해주시오

1일 1글 시즌4 [episode 55]필사노트 '인생 우화' 中 류시화

필사노트 '인생우화'中  / 류시화 지음




신성한 책에 따르면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각각의 영혼에 탄생을 주관할 천를 한 명 씩 지정했다. 그 천사 들은 모든 영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세상에 내려가 기쁘게 살고, 배움을 얻고, 더 지혜로워져라."


그 후 신은 언제나 그렇듯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세상에 내려간 영혼들의 천사의 속삭임을 얼마나 기억하는지를. 인간들은 아름다운 마음과 도시를 세우고, 예술을 창조하고, 춤추며 노래했다. 많은 숫자는 아니어도 삶의 기쁨과 행복을 발견해 나갔다. 그런 모습을 보며 신은 점점 더 좋은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나빠져만 갔다. 인간 세상이 번창함에 따라 천사의 속삭임을 잊은 영혼의 숫자가 나날이 늘어났다. 어떤 장소에는 지혜로운 자들이 많았지만, 또 다른 장소에서는 어리석은 자들이 세상을 지배했다.


마침내 신은 두 명의 천사를 불러 그중 한 천사에게 말했다.


"지상에 내려가 지혜로운 영혼들을 모두 모으라. 그리고 마을과 도시에 골고루 떨어뜨리라. 그들이 어리석은 자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두 번째 천사에게는 이렇게 지시했다.


"그대는 지상에 있는 어리석은 영혼들을 모두 자루에 담아 데려오라. 내가 그들을 지혜로운 영혼으로 바로잡아 다시 세상에 내려보내리라."


첫 번째 천사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지혜로운 영혼들을 찾아 먼 거리를 여행해야 했지만, 숫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각각의 장소에 고르게 옮겨 놓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천사의 임무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비교가 안 될 만큼 힘든 일이었다. 어느 곳을 가든 어리석은 영혼이 셀 수 없이 많았으며, 신의 지시대로 자루에 넣으려 하면 몹시 저항하며 발버둥 쳤다. 그들을 설득해 자루에 담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자루가 가득 차자 천사는 지체 없이 신이 있는 곳으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거대한 자루를 메고 하늘을 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자루 속 영혼들이 소란을 피워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산 정상을 가까스로 넘는 순간 천사는 자루의 무게 때문에 날개의 통제력을 잃고 휘청거렸으며, 키 큰 소나무의 뾰족한 솔잎에 찔려 자루 밑이 찢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자루 안에 있던 영혼들이 일제히 쏟아져 산 아래 마을로 굴러 떨어졌다. 천사는 망연자실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영혼들이 우연히 굴러 떨어진 그곳은 폴란드의 헤움이라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천사는 절망과 두려움에 차서 빈 자루를 들고 신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실수를 괴로워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신이 천사를 위로하며 말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 어쩔 수 없는 사고였으므로 이미 용서받았다. 저들을 그냥 저 장소에 살게 하자. 그리고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지 지켜보도록 하자. 어쩌면 좋은 결과를 얻으리도 모르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세상의 모든 바보들이 한 장소에 모여 살게 되었다. 예상과 달리 그들은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그곳을 세상 어느 곳보다 행복한 장소로 만들었다. 서로가 비슷한 만큼의 지혜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문제가 있을 때마다 서로의 비슷한 지혜로 해답을 찾아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을 '현자들의 마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 중에서 더 지혜로운(실제로는 더 어리석은) 현자 일곱 명을 뽑아 의회를 구성했다. 개인의 지혜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의회에 도움을 요청했으며, 일곱 현자는 7일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해결책을 제시하곤 했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믿는 '바보들의 마을, 헤움'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은 것이다.




헤르셸이라는 이름의 빵장수가 살았다. 헤움에 거주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겉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남자였다 뛰어난 제빵사일 뿐 아니라 철학자이기도 한 헤르셸은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곤 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여러 해답들 중에서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았다. 자신은 빵 굽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밀가루 반죽을 하는 자신의 손가락, 발효가 되어 부풀어 오르는 반죽, 오븐에서 알맞게 구워질 때 나는 빵 내음까지 사랑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는 '빵 굽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종종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헤르셸뿐 아니라 헤움의 공중목욕탕에서 남자들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곧잘 토론하는 철학적 질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그 대답을 추구해 나가곤 했다.


어느 날 목욕탕에 남자들이 모였을 때, 양복 가게를 하는 이체크가 말했다.


"난 오래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어. 우리를 우리 자신이게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러자 우유 배달부 에덱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간은 모두 똑같게 창조되었다고 성경에 적혀있어."


굴뚝 청소부 테브예도 말했다.


"맞아, 따라서 우리를 구분해 주는 것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야."


그 말에 빵장수 헤르셸은 놀라서 목욕탕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남자가 허리에 똑같은 흰 수건 하나씩만 두르고 있었다. 헤르셸은 말없이 깊은 고민에 잠겼다. 만약 각 사람의 존재를 구분해 주는 것이 옷이라면, 그 옷을 벗으면 어떻게 되지? 이러다가 어느 날 목욕탕에서 발가벗은 채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예감이 앞섰다. 밀가루 범벅인 앞치마를 벗으면 사람들이 그를 신발 수선공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큰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남은 인생을 신발 수선공의 둥근 의자에서 보내야만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 나쁜 것은, 사람들이 그를 물 나르는 사람으로 혼동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죽을 때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물이 가득 든 무거운 가죽 주머니를 어깨에 지고 날라야 할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를 지붕 수리공으로 착각한다면? 뜨거운 태양 아래서 지붕을 수리하며 인생을 보내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헤르셸은 달콤한 냄새가 나는 자신의 빵 가게에서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었다. 맛있는 아몬드 케이크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헤르셸은 불행한 사태를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일단 사태를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일단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하기 위해 오른쪽 손목에 붉은색 끈을 한 가닥 묶었다. 그러고 나서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이것이 내가 빵 굽는 헤르셸이라는 표시야.'


그렇게 하자 오븐 속의 빵처럼 가슴이 기쁨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제는 벌거벗은 공중목욕탕에서도 변함없이 빵장수 헤르셸일 수가 있었다. 목욕탕에 갈 때마다 그는 옷을 다 벗기 전에 재빨리 손목에 붉은색 끈을 묶었다.


'이것이 내가 나라는 증거야.'


밝게 빛나는 끈을 보며 그는 혼자 미소 지었다.


어느 날 외지인이 헤움으로 이사를 왔다. 직업이 목수인 이 남자는 헤움의 숲에 나무가 많아 목공일을 구하기 쉽다는 소문을 듣고 가족과 함께 헤움으로 이주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경우에 맞는 행동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남자는 헤움의 관습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이사 온 며칠 후 공중목욕탕에 가서 옷을 벗고 탕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는 오른쪽 손목에 붉은색 끈을 묶는 빵장수 헤르셸을 보게 되었다. 외지에서 온 남자는 턱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이상한 관습이긴 하지만, 헤움 사람들이 공중목욕탕에서 지키는 규칙임에 틀림없어.'


그다음 주 금요일, 안식일(유대교에서는 금요일 해 질 녘으로부터 토요일 해 질 녘까지)의 정결함을 위해 목욕탕으로 간 헤르셸은 손목에 끈을 묶은 뒤 수건만 허리에 걸치고 탕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따라 뜨거운 증기에 몸을 맡기고 오랫동안 목욕을 즐겼다.


목욕을 마치고 탈의실로 걸어가면서 헤르셸은 몸이 무척 정결해지고 상쾌해진 것을 느꼈다.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자신이 빵장수 헤르셸인지 확인하기 위해 손목에 묶은 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끈이 사라지고 없는 게 아닌가!


심장이 두근거리고 두려움이 엄습했다. 설상가상으로 헤르셸이 고개를 들었을 때,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손목에는 밝게 빛나는 붉은색 끝을 묶은 한 낯선 남자를 보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금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헤르셸은 생각했다.


'만약 저 남자가 나라면, 그럼 나는 누구지?'


헤르셸은 극심한 공포로 몸을 떨며 조심스럽게 그 낯선 남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친구여, 나는 당신을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바로 나입니다. 아니면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빵장수 헤르셸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빵장수 헤르셸만이 목욕탕에 들어갈 때 손목에 붉은색 끈을 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례가 안 된다면, 나에게 말해주시오. 만약 당신이 빵장수 헤르셸이라면, 나는 누구인가요? 제발 말 좀 해주시오. 남은 인생 동안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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