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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29. 2020

망각이 능력이다

1일 1글 시즌4 [episode 61] 필사노트; 호모 아르텍스 中

우리는 흔히 기억하는 것만을 능력이라고 생각하지만 망각 역시 기억 못지않게 중요한 능력이다. 아니, 망각이야말로 어떤 점에서는 기억보다 더 중요한 능력인지도 모른다. 기억과 습속은 종종 새로운 감각이나 사유를 향해 신체를 여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놀이에 몰두할 수 있는 건 과거에 했던 놀이의 결과에 연연해 하지 않고, 같은 놀이를 반복할 때 조차 거기서 매번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또 기억에 얽매이지 않는 아이들은 사물을 볼 때 그것의 '그러해야 함'을 보는 게 아니라 '그것임'을 본다. 종종 아이들의 눈에 포착되는 세계가 놀라우리만치 진실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대교악졸(大巧若拙),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커다란 기교는 졸함(미숙함)과 같다'는 뜻이다. 즉, 어떤 분야든 경지에 이른 대가들은 그 경지에 이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법칙들로부터, 심지어 자신이 서있는 경지로부터도 자유로어져서 어린아이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는 것, 많은 작가들의 말년 작품이 보다 단순하고 명확해지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따라서 '아이스러워진다'는 말은 아이처럼 유치해진다는 게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앎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자 가장 장엄한 소리르 담을 수 있었던 베토벤처럼, 아이가 되기 위해선 먼저 자신을 가두는 기억을 잊을 수 있어야 한다. 거대하고 단단한 기억을 뛰어넘어 새로운 미래의 기억을 마드는 거인-아이 되기! 그럴 수만 있다면,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정말 멋진 일 아닌가, 나이를 먹으면서 더 잘 웃고, 더 용감한 아이가 될 수 있다면 말이다. 영원한 젊음이란 늙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늙으면서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거대한 노인-아이의 특권이다. 


[채운, 호모 아르텍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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