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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Jun 12. 2020

전철 무료 패스

1일 1글 시즌4 [episode 75]

인사동 초입, 맥주도 소주도 팔고, 

60대의 여인이 통기타를 치며 노래도 불러주는 

시간이 멈춘 오래된 생맥주 집에서

우연히 뵙게 된 시인.

핏기 없는 흰 얼굴에 빵모자를 눌러쓴

원래 웃는 눈이 웃음 지을 때마다 반달 모양이 되고

처음 만난 나와 후배에게 시집을 건넨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집으로 와 읽어본 시집은 

그 시인의 넓고 깊은 삶의 궤적이 무한으로 펼쳐져 있더라.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던 

다른 시인의 말처럼

그 어마어마한 인생 전체가 담긴 한 사람을 

우리는 짧은 순간 재단하고, 평가하고 가끔은 손절한다.

그 시인의 예순다섯 살 되던 어느 날의 이야기는

내 마음에 작은 돌 하나를 던져놓는다.

전철 무료 패스를 받게 되는 날

나는 과연 어떤 마음일까?



그날, 오이도행 전철을 탔다. (이만주)


노령인구로 편입되던 날

손에 쥐게 된 전철 무료 패스


무작정 전철을 타고 섬에 가고 싶었다. 


가끔 타지만

종점까지는 가본 적 없는

오이도행 전철


전철 안은

지나간 생처럼

어느 땐 시끌시끌했고

어느 땐 한산했다. 

인간 수명 백세시대라지만

어느덧 막은 내리고


달리는 전철 속에서

65년 과거가

하나의 묶음이 되어

자루 속에 담겼다. 


남이 안 볼 때

그 자루를 섬에 

내동댕이치고

오고 싶었다.


하지만

뭍과 섬 사이가 메워져

오이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지공거사가 된 것을

바닷가

허름한 횟집에서

소주 1병으로 

자축하는데


65년이 담긴 자루가

옆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섬에 

격리시키려던

자루를 

다시 메고


돌아오는 전철을

타야만 했다


그런데 전철 안 어디선가 실낱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생각하기 나름이야. 괜찮았던 날들도 많았잖아. 모든 생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나는 이제 늙어, 환청이 들리는 게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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