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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Jun 17. 2020

그림 속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1일 1글 시즌4 [episode 80]

 

그리 속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로마의 핍박을 피해 지하 묘지이자 예배처인 카타콤에서 비밀리에 종교 활동을 하였습니다. 카타콤의 내부에는 신앙을 상징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프레스코화나 부조 형식으로 남아있는데 대표적 상징이 바로 ‘익투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첫 글자에서 따온 ΙΧΘΥΣ(익투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개의 곡선이 교차하며 만들어낸 물고기의 머리 부분이 화살표 역할을 하여 복잡한 지하 통로를 안내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하에서 머물던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을 받게 된 후 지상에 교회를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성인들의 그림으로 장식합니다. 글을 읽지 못하던 신도들에게 그림은 성경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중요한 매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신이 인간으로 태어남), 성인들의 삶과 순교가 주는 교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등은 신도들의 신앙심 고취를 위한 중요한 시각적 메시지였고 당시의 화가들은 자신들의 사명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적인 모습은 짧은 수염에 갸름한 얼굴, 어깨까지 닿는 갈색 곱슬머리의 젊은 남성의 모습입니다. 언제부터 예수는 이런 모습으로 표현되기 시작했을까요? 1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대교적 관념이 많이 남아 예수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일종의 우상숭배처럼 여겨져서 앞서 이야기한 물고기나 십자가, 빵과 포도주 같은 상징적인 묘사가 많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카타콤의 벽이나 천정에 실제 인물의 묘사가 늘어납니다. 3세기의 로마 프리실라 카타콤, 4세기의 로마 비아 라티나 카타콤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을 보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짧은 머리의 건장한 젊은 청년의 모습은 오히려 로마인의 모습과 더 가깝습니다. 양을 어깨에 짊어지고 몸의 무게 중심을 한쪽 다리에 싣고 자연스럽게 서있습니다. ‘선한 목자’로 불리는 로마 프리실라 카타콤의 예수 도상은 콘트라 포스트라고 하는 자세의 로마시대 청년의 조각상으로부터 차용된 이미지입니다. 


왼쪽:  로마 프리실라 카타콤 벽화에 그려진 예수(3세기)   오른쪽: 로마 비아 라티나 카타콤 벽화에 그려진 예수( 4세기)



 313년 기독교의 공인, 330년 로마가 오늘날의 이스탄불인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겨가며  기독교 미술은 과거 카타콤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꽃핍니다.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바뀝니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하여 10세기 동안 지속된 미술을 '비잔틴 미술'이라고 부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데에는 분열된 로마를 결집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부활절에 관한 논쟁을 정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삼위일체설을 교리로 확정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기독교 미술은 국가의 지지를 받으며 발전하기 시작했고  392년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표되며 기독교는 그에 걸맞은 새로운 위상으로 변화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품과 위엄을 드러내며 온화하지만 강한 신성을 드러내는 이미지로의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인성과 신성이 함께 드러나되 그 표현은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으로 합당한 도상이어야 했습니다. 6세기경 왼손엔 성경을 들고 정면을 보며 오른손으로 축복을 의미하는 손 모양을 한 판토크라토르(Pantocrator)라는 이콘이 대표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정착됩니다. 판토크라토르는 ‘전능하신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왼쪽:   판토크라토르, 하기아 소피아 성당, 터키 이스탄불, 6세기      오른쪽: 판토크라토르, 카타리나 수도원, 이집트 시나이, 6세기

  

서로마의 카타콤에서 발견된 예수는 짧은 머리카락의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로마  비잔틴 미술의 예수는 수염을 기르고 긴 머리의 엄숙한 모습으로 지금 우리가 전형으로 갖고 있는 예수의 모습에 더 가깝습니다. 


예수의 머리카락을 길게 묘사하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 남아있던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로마 신화의 신인 제우스나 아폴론과 비슷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설입니다. 또 마태오 복음서에 예수 탄생 때에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천사가 말하는데 여기서 ‘나자렛’이란 ‘나지르’를 의미한다는 설입니다. ‘나지르’란 오늘날의 수도자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자로써 일생동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규율을 가지는데 대표적 나지르가 ‘삼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가 머리를 길렀다고 주장하는 설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의 모습을 재현하거나 추측할 증거는 없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발전한 동방교회에서는 판토크라토르와 같이 구도와 자세, 표정, 옷 색깔도 공식에 맞추어 그려야 했습니다. 지금도  동방교회에서는 기존의 방식대로 이콘이 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에서는 예수의 용모가 점차 개성적인 모습으로 변주됩니다.  신성을 드러내는 그리스도, 설교자, 구원자, 심판자, 고통받는 희생자 등 다양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주되면 회화에 등장하게 됩니다. 



왼쪽: 심판자 예수(최후의 심판 중 일부, 미켈란젤로)  가운데: 신성의 예수(가나의 혼인잔치 중 일부, 베로네세) 오른쪽: 고통받는 희생자 예수(이젠하임 재단화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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