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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Jun 03. 2018

뭔 말이야?

  의사소통은 삶의 기본이다.

피자집을 운영하는 부부는 한 고객이 자신들의 블로그에 올린 댓글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존맛탱!”


“아! 연예인들이 자신에 대한 악플을 마주했을 때 이런 느낌이겠구나” 생각하며 딸아이에게 문자를 보내 조심스레 의미를 물어보니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너무 맛있다”라는 의미의 신조어란다. 비로소 부부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고 했다. 풀리지 않는 암호 같던 그 단어는 잠시 동안 그 부부를 마음 속 전쟁터로 내몰았을 듯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24시간마다 바뀌는 해독 불가의 절대암호 시스템인 독일군의 ‘에니그마’를 해독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수학자, 언어학자 등을 모아 암호해독팀을 만든다. 팀에 합류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은 연구 끝에 에니그마를 해독할 수 있는 ‘크리스토퍼’를 개발한다. 그의 발명 덕분에 독일군의 암호를 풀 수 있었고 1400만명의 목숨을 구하며 종전을 2년 정도 앞당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앨런튜링의 이야기를  담은 '이미테이션 게임'


암호는 로마 시대부터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예전에는 주로 군사 목적이나 외교 통신 등에 사용되었지만, 현재에는 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자신의 인터넷 계정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해야 하고, 신용카드 사용이나 보안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는 빌딩의 출입을 위해선 암호가 들어 있는 출입증이 필요하다. 이제는 암호가 특정 내용을 감추어 전달하는 것뿐 아니라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용도로까지 확장되었다.

예전 같으면 가족, 친구, 지인들의 전화번호 정도는 외우고 다녔을 텐데, 지금은 남의 전화 번호는 물론 자신의 폰 번호도 가끔 기억이 안 난다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삶에 IT가 깊숙이 관여하면서 디지털 치매를 염려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억하지 않아도 될 전화번호 대신 기억해야만 하는 암호는 얼마나 많은가. 아파트 현관 도어록의 비번, 사무실 현관의 비번, 스포츠센터의 라커룸 비번, 인터넷 뱅킹과 세금계산서 발급을 위한 여러 개의 공인인증서 암호, 카드결재 안심번호, 다양한 인터넷 사이트의 비밀번호 등 디지털 치매를 걱정하기보단 디지털 신경쇠약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마주보고 있는 거울이 끊임없는 반영을 만들어내듯 암호는 암호를 필요로 하고 그 암호는 또 다른 암호를 필요로 하고….

그러나 이 시대에 넘쳐나는 암호가 그것뿐이랴. 피자집 부부를 잠시 긴장시켰던 인터넷 신조어는 물론 국적과 지역의 특성을 빗대어 사람을 비하하는 은어들, 고객은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용어를 남발하는 사람들, 화성과 금성에서 온 것처럼 근본적 소통이 어렵다는 남자와 여자의 언어 차이들. 이 시대의 암호란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의 소통법으로 그 외의 타자들을 소외시키고 스스로를 셀프 고립시킨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를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라 말했다. 기표란 단어의 소리를 표현하는 형태를, 기의는 용어에 의해 의미되는 개념을 말한다. 우리가 ‘책’이라고 했을 때, ‘책’이라고 표기한 글자를 기표라고. 머리 속에 떠오른 의미를 기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후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은 “기표가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고 했다. 기호 형태인 기표는 어떻게 하더라도 기호의 내용인 기의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우리가 아무리 동일한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한다고 해도 그 의미를 정확히 공유할 수 없는 맹점을 언어는 이미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하물며 암호 같은 언어가 횡행하는 사회에선 소통이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언어는 소통이라는 실용적인 목표 이전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철학과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 기반 위에 공감과 이해가 튼튼히 쌓여 갈 때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로 제역할을 해 내는 것 아닐까?

일찍이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글자 없이 생활하면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음을 마음 아프게 여겼다. 그래서 세종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소리나는 것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새 글자를 만들었다. 한글은 세계 2900여개의 언어 중 가장 우수한 언어로 꼽힌다.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 권력의 언어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권력자나 지식인이 번역해 주는 통제된 소통이 아닌, 직접적인 소통을 꿈꾸고 실천할 수 있는 언어를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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