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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Jun 06. 2018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꽃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판도라>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완벽한 여성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나의 개인적인 선호도를 근거로 하여 상상해 보니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얼굴에 앤젤리나 졸리의 몸매, 오드리 햅번의 인류애, 카미유 클로델의 능력, 헬렌 켈러의 의지력이 조합된 여성이 그려진다. 과연 그런 여성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존재가 있었다. 신으로부터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 그녀의 이름은 ‘판도라’! 물론 그리스 신화에서 인류 최초의 여성으로 등장하니 실존 인물은 아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서 아름다움과 교태와 욕망을, 여행과 전령의 신 헤르메스에게서 재치와 설득력 있는 말솜씨를, 그리고 지혜의 여신 아테나에게서 섬세한 방직 기술까지 물려받은, 여신을 닮은 이 처녀는 그리스 신들의 고귀한 재능을 한꺼번에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판도라는 제우스가 인간에게 보낸 ‘아름다운 재앙’이었다. 인간에게 신의 불씨를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와 불씨를 받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 하나를 들려 인간 세상으로 보낸 것이다. 판도라의 치명적 매력에 그녀를 아내로 맞은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 상자를 “절대로 열어봐서는 안 된다”는 제우스의 당부에도 판도라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상자 안에 갇혀 있던 가난, 슬픔, 질병, 전쟁, 증오, 시기 등 인류가 겪을 온갖 재앙이 상자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놀란 그녀가 황급히 뚜껑을 닫아 희망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로부터 인류는 생의 전반에 걸쳐 고통으로 신음하게 되었으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이 인간을 벌하기 위해 만든 그 상자 안에 희망이 함께 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을 벌하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판도라를 주인공으로 그린 그림 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1849~1917)의 작품 ‘판도라’는 매혹적인 판도라의 모습이 잘 표현된 수작이다. 호기심에 못 이겨 상자를 슬며시 열어 보는 모습에서, 앞으로 다가올 인류의 불행과 희망의 동시다발적인 출현을 예상치 못한 그녀의 두근거림이 전해진다. 그녀의 잘못으로 인류에게 재앙이 닥쳤다고 할 수도, 혹은 그나마 뚜껑을 재빨리 닫은 그녀 덕분에 우리에겐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쨌건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이란 고통으로 점철된 삶일지라도 버텨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고통과 재앙이라는 전제 하에 희망은 그 의미를 완성하게 되듯,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다.


 John william waterhouse, 1898,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 상자속에서 온갖 재앙들이 스물 스물 나오고 있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는 1938년 파시즘과 극우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어느 날, 유대인인 귀도와 아들 조슈아는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고, 유태인이 아니었음에도 남편과 아이를 따라 함께 수용소로 간 아내 도라는 여자 수용소에 갇히게 되며 귀도와 떨어지게 된다. 수용소의 참혹한 현실 속에서 어린 조슈아가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귀도는 수용소 생활이 하나의 게임이며, 1000점을 먼저 따는 사람은 탱크를 선물로 받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어느 날 나치 장교의 숙소에서 열린 파티에서 음식을 나르게 된 귀도는 숙소 한 구석의 축음기를 발견한다. 그 옆에 놓인 몇 장의 음반에서 자신이 도라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오페라의 음반을 찾아낸 귀도는 축음기를 창가로 돌려놓고 수용소 전체에 울려 퍼지게 음악을 튼다. 오펜바하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중 ‘뱃노래’였다. 어두운 수용소의 찬 공기 속에 흐르는 노래는 여자 수용소의 도라에게까지 들려오고 그 음악에 이끌려 창가에 선 도라의 얼굴에 한 줄기 달빛이 비친다. 눈물을 흘리며 그 순간의 감동을 느끼는 도라는 귀도가 살아있다는 안도와 희망을 갖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귀도는 아들 조슈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은 총살을 당하지만 도라는 살아남는다. 아마도 그 노래에 담긴 희망이 도라를 살아남게 했을 것이다.


귀도와 도라가 처음 만나서 들었던 <오펜바흐의 뱃노래>가 수용소에 울려퍼지자 도라는 희망의 눈물을 흘린다(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중)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앞으로 난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길이 아예 없어 보이기도 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 그렇다. 그 어느 때보다 세대, 계층, 이념 간 반목이 심하다. 청년은 청년대로, 기성세대는 기성세대대로, 노년층은 노년층대로 힘들다고, 아프다고 소리친다. 아이들을 학대하는 부모와 교사, 노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젊은이, 돈이 많다고 나이가 많다고 젊은이들에게 막말하는 어른들, 선거철에만 허리 숙이는 정치인들,  수없이 많은 갑의 횡포... 더 나열하지 말자. 과연 이 시대에 희망을 기대해도 되는 건지 두렵고 염려스럽다.


  그러나 빨간 머리 앤의 말 “희망이란 말은 희망 속에 있지 않아.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는 꽃인 걸, 그 꽃에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거야”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절망이 깊으면 깊을수록 희망은 더 큰 힘을 지니게 되는 아이러니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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