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거장들의 위로
"난 내가 이렇게 살 줄 몰랐어" M언니가 말했다.
맥주컵에 소주를 조금 넣은 후 맥주를 따르던 J가 고개를 들어 M언니를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J가 무언가 말하려 입을 떼려는 순간을 비집고 들어가 내가 말했다.
"나도! 나도 내가 이렇게 살 줄 몰랐어"
J는 다시 눈길을 아래로 향해 맥주컵에 젓가락을 넣어 탁탁하고 두 번 쳤다. 거품이 올라왔다.
25년 전 우리 셋은 생애 최초 배낭여행 멤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배낭여행은 젊음의 상징이었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여정을 깔깔거리며 잘도 다녔다. 방콕에서 파타야로, 수랏타니와 코팡간까지 각자 기억하고 있는 사건과 그림은 달랐지만 25년 만에 우리는 각자 간직해온 기억을 퍼즐 조각 맞추듯 끼워 맞추며 각자의 기억에 보수공사를 했다.
"그땐 말이야, 난 나이 먹으면 정말 기똥차게 잘 살 거라고 생각했거든..." M언니가 말했다.
"그니까... 나도 뭐 한가닥 하고 살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맞장구 치자
"뭐, 지금 우리 다 열심히 잘 살고 있는 거잖아" J가 애써 위로하려 했지만 자신도 수긍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어쩌다 어른! 정말 어쩌다 이 나이가 되었구나.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영화 <은교>의 대사도 위로가 되지 않는 밤. 이수만의 SM에서 만들었다는 산꼭대기의 번쩍번쩍한 호텔에서 바라본 바다는 25년 전 코팡간의 바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오라스 베르네가 그린 <바티칸 성당의 라파엘>은 1832년에 그려진 그림이다. 1400년대 후반 그러니까 당시로부터 400여 년 전 르네상스가 절정에 달했던 시대의 라파엘로가 바티칸 성당의 광장에서 성모와 아기 예수의 모델을 앉혀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다. 라파엘로의 얼굴은 라파엘로의 자화상을 토대로 그려졌고 왼쪽 상단 부분의 흰수염의 율리우스 2세의 모습 또한 라파엘로가 그려놓은 율리우스 2세의 초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조각 같은 꽃미남으로 당시 많은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남겨놓은 두 점의 자화상을 봐도 그의 미모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라스 베르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또 다른 두 남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다. 그들은 동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림과 같은 상황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절대 일어날 수 없었던 일도 아니었을 거다.
우리나라의 경우 라파엘로는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에 비해 덜 알려진 화가지만 19세기 전반까지는 르네상스의 3대 거장 중 최고로 여겨졌던 화가가 라파엘로다. 오라스 베르네의 설정을 보면 당시 유럽 사람들이 라파엘로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잘 드러난다. 실제로 라파엘로의 그림은 그가 사망한 후 400년에 걸쳐 유럽 전역의 예술 아카데미의 교과서로 이용되었다.
그림 속의 라파엘로가 25살이라고 가정한다면 우측 상단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56세, 좌측 하단의 미켈란젤로는 33살이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경쟁으로 대립할 때 그 두 거장의 영향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화풍으로 미술계를 장악한 라파엘로. 잘생기고 성격도 좋고 실력마저도 좋았던 라파엘로, 심지어 교황청의 막강한 권력자인 메디치 비비에나 추기경의 조카와 약혼까지 한 그를 바라보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마음은 어땠을까?
전해지는 그들의 생애를 고려해보니 그다지 주변을 상관 않고 살았을 것 같긴 하다. 그들은 늘 그림에 조각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고, 끊임없이 자신과 싸웠던 사람들이니까. 아무튼 라파엘로는 37살에 요절했다. 다빈치는 68세, 미켈란젤로는 90세까지 살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괜히 25년 전 추억으로부터 강제 현실 소환되어 마주한 내 모습이 못마땅해서 이 그림, 저 그림 찾다 만난 오라스 베르네의 그림, 그 그림 속에서 빛나고 있는 라파엘로. 그러나 오늘은 그 그림의 구석에서 라파엘로를 바라보고 있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내 어깨를 툭툭 쳐준다.
"이봐! 시간은 흘러서 가버리는 것이 아냐, 시간은 쌓이는 거라고, 네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시간들이 지금의 너를 만든 거라고... 퇴적된 시간이 만든 삶의 지층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지 누구에 비해 좋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나 참! 살다 보니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위로를 다 받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