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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Jul 03. 2020

서랍속에 오래 들어 있던 글

1일 1글 시즌 4 [episode 97]

"밀도있는 글은 연습으로 가능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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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옥스퍼드대학 종교학 시험에 나온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을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서술하라"란 문제에 어린 바이런이 쓴 글
"물이 주인을 만나 얼굴이 붉어졌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러운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 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개 한개가 낱낱이 바람에 산화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은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산수유는 다만 아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그림자 속에서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과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 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이 피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김훈-자전거여행중)

"그 때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노라고
방 하나에 식구들이 바글바글했노라고
그 얘기만 한다.
회를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한번 안아보자며 슬쩍 당기더니
이마에 입술을 댄다." (한명석-나는 쓰는 대로 이루어진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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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들처럼 행간사이에 영적신념과 인간사와 온 우주가 들어있는 글 말이다.

한명석선생님의 글쓰기 수업 2번째 시간에 내가 던진 질문이다.
나의 시선이 선생님의 눈에서 입으로, 머리카락 끝으로 옮겨질때 쯤 들려온 답.

"삶자체가 바뀌어야 겠지요?"

'삶...자체가...바뀌어야...한다...' 머리속 공간으로 자꾸 반복되는 메아리.

임계점이었던것 같다. 난 한번도 뜨거운적 없었던, 연탄재보다 못했던 그런 사람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던 즈음. 미덥지않은 내 행동과 만족스럽지 않은 내 삶의 모래산에 마지막 모래 한알을 얹으신거다. 그 순간 나는 무너져내렸다.

그런때가 있다. 눈의 촛점이 풀리고, 단정한 입매무새를 위해 힘주었던 입술끝의 근육이 느슨해져 입은 반쯤 벌어지고, 내 몸속의 아드레날린과 코티졸을 만들틈도 없는  무방비 상태. 알레테이아였다.

2012년 3월 12일 [나는 쓰는 대로 이루어진다]를 처음 읽은 날이다.
대부분의 경우 책의 앞쪽에 처음 읽은 날짜, 장소정도만을 적어놓는데, 이 책을 읽고선 어떤 자극을 받았었는지, 책의 맨 뒷장 여백에 빽빽하게 글이 적혀있다. 그 글을 썼다는 것도 잊고 있었는데, 글쓰기 수업을 하게되며 다시 집어들게 되었고 책을 휘리릭 넘겨보다 맨 뒷장의 메모를 보게 된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과 똑같은 것이었다. 즉, 난 1년전의 나와 동일한 나였던 것이다. 

책을 펼치고 가만히 손을 얹어본다. 점자책을 읽는것처럼 글자 하나하나에 새겨진 에너지를 느껴본다. 그저 밋밋한 종이다. 그러나 글자 뒤로 펼쳐지는 그 공간이 깊은 우물같다. 처음 읽을때와는 또 다른곳에 빨간 줄이 그어진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책장을 덮으며 마치 천기누설이라도 될까 손바닥으로 책을 감쌌다.
문득 조현석의 시가 생각났다.

"검은 글만 가득한 세상이다 하루 종일 표지부터 더듬더듬 점자책 읽듯 끝장까지 훑은 뒤 뒤표지를 보면 어느 새 검붉은 노을이다 순간 발화점에 다다른 세상을 한 곳에 가두는 자물쇠이다."  (조현석- 불타는 책 중) 


책속에서 선생님은 어떨 땐 나즈막히, 어느순간엔 아주 강력한 자신감으로 우리에게 말한다. 진정으로 자신이 경험한 희열을 나누고 싶어하는것처럼. 

"쓸만한 글감을 하나 떠올린 순간,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순간, 심장에서 시작한 전율이 격하면서도 잔잔하게 전신으로 퍼지는데, 내게는 어떤 도락도 이 즐거움을 따라오지 못한다. (p14) 

"무언가 색다른 것을 보더라도 이렇다할 느낌이 없다면 삶에 대한 태만을 부끄러워해야 옳다.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애정이 부족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 어떤 경험도 우리가 의미를 부여해야 의미가 생기는 것이지 그 자체에 의미가 들어 있지는 않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깊이 보고 나의 언어로 표현해 냄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자질인지도 모른다. (p30)

"삶에 대한 탐구심부터 회복해야겠다. 늘 배우고 익혀서 나날이 성장하는 자의 자부심으로 무장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창을 활짝 열어야겠다. 꽃피면 꽃구경 다니고 영화와 전시회도 자주 보러가고, 여행을 말할것도 없고, 살아있음의 경험에 푹 빠져야겠다. 그럼으로써 온기와 생기가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다. (55)

"내가 쓴 글이 다른 사람의 마음의 종을 울릴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p104)

"이처럼 글을 쓰는 일은 통찰력을 날카롭게 벼려 주어 사물의 이면을 보게 해준다. 글쓰기의 위력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생각이 깊어지는 듯한 이 느낌이 제일 좋다. 일상에서 발견한 작은 깨달음은 한 편의 글로 전환되어 또 다른 성취감으롤 변주되고, 이런 희열을 느낄때마다 나는 더욱 커진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점점 강렬해져 공부도 더 열심히 하게 되고, 종이 책뿐만 아니라 사람 책에도 점점 내공이 깊어진다. 삶-공부-글 이라는 연결고리가 살아가는 재미와 힘을 더해준다. 내 안에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자원이 모두 들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어 담대해진다." (p151)

"최선의 자신을 찾고자 하는 에너지를 자가발전 하는 사람"(p182)

"'무'에서 시작한 내 글이 "유"로 나아가는 전 과정을 즐겨야 한다. 뜻하지 않게 튀어나온 문장에 감탄하고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 낸 해방감을 만끽하며 해냈다는 자부심에 뿌듯해야 한다."(p183)

"글쓰기를 통해 그대가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가지에 가지를 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심사를 좇아 이번 생에 주어진 기회를 모조리 탐구해보자.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 온몸을 던져 보자. 진중한 탐구심과 근면한 실행력을 가지고 있는 힘껏 살아서 "삶은 내 의도대로 되었다."고 말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한번 살아 보자.(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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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현의 원작 만화 "매리는 외박중"의 TV버전에서 매리는 남자주인공 무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언제까지 그렇게 니가 좋아하는 음악만 하고 살래?"
무결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답한다. 
"이번 생엔 그렇게 살고 싶어."

나의 전생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나의 내세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르겠지만
지금살고 있는 이 세상, 앞으로의 남은 생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것 같다. 
글쓰기를 좋아할 수 있도록, 그 일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일인지를 일깨워준 
[나는 쓰는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책이 고마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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