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정 Jul 28. 2018

방구석에서 쉽게 말하는 인생

나도 못 본 진짜 내 모습

이태원의 중심도로 중간에 있는 4층짜리 커피숍의 벽에는 재미있는 세계지도가 있다. 가로 1미터 50에 세로 1미터 정도 되는 지도가 붙어 있고 그 위엔 “Tell me where you are from”라는 글이 쓰여 있다. 아프리카의 몇 개 나라를 제외하고 알록달록 깃발 모양의 압정이 촘촘히 꽂혀 있다. 이태원이라는 특성이 반영되었겠지만, 이미 세상은 물리적인 공간의 한계를 벗어 난지 오래다.


실제로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쪽으로 30분 비행을 하면 중국의 동해안이 보인다. 그곳에서 다시 30분을 더 날아가면 북경과 만리장성이 보인다. 그곳을 지나 고비사막을 거쳐 유럽으로 갈 수 있다. 조만간 기차를 타고 유럽으로 갈 수 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니다. 누구든 인터넷에 접속만 하면 세계 각국의 공식, 비공식적 뉴스들을 빠르게 접할 수 있고, SNS를 통해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소통하기도 한다. 부모님 세대는 상상도 못 하였을 그런 세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개념은 20여 년 사이에 급격히 바뀌었다.


공간 개념뿐이 아니다. 지금 글을 쓰며 듣고 있는 음악은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란 곡인데 1866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가 1888년 작곡한 작품이다. 그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않고 권위에 대한 반발을 바탕으로 곡을 만드는 작곡가였다. 그 당시 비평가들에게 조소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을 듣기 위해 유튜브에 접속했더니 이 곡을 연주한 많은 연주자들 사이에 막심 므라비차의 연주가 눈에 띈다. 1975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크로스오버 피아니스트인 그는 1999년 그의 8번째 정규앨범에서 사티의 짐노페디를 수록했는데, 원곡과는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프랑스와 크로아티아 그리고 무려 100년의 차이를 두고 태어난 두 예술가의 음악을 서울의 한 곳에 앉아서 들을 수 있다는 것.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내 앞에서 연주하는 두 예술가를 바라보는 이 감동을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왼쪽:  에릭사티 1866~ 1925        오른쪽: 막심 므라비차 1975~



이미 세상은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의 진입을 요구한다. 새로운 세상에는 더 이상 지역, 성별, 나이, 인종, 학력이 그의 존재를 구별 짓는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 시간의 개념도 공간의 개념에도 한계가 없다.


22억 8천만의 조회수를 기록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잊히기도 전에 BTS의 '페이크 러브'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에 업로드되고 8시간 4분 만에 조회수 1,000만 건을 기록하더니 9일 만에 1억 건, 44일 만에 2억 건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바로 이러한 한계가 없는 세상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한계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 맨 인 블랙(1997)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자신의 목에 달린 방울 안에 은하계가 들어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 또한 세상의 모든 공간적, 시간적 개념을 타파하는 첨단 디바이스를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농경시대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DNA로 통제되는 사고방식에 따라 조정당하고 산다.


장자(莊子) 추수 편( 秋水篇) 하백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늘 자기가 사는 마을의 강을  보면서 그 넓고 풍부함에 감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홍수로 인해 황허가 흘러들어 엄청나게 불어난 강물의 모습에 놀라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다가 마침내 북해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다의 신을 만나게 된다. 천하가 모두 물로 그 끝이 보이지 않자 하백은 감탄하며 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속담에 이르기를 백 가지 도를 듣고서는 자기 만한 자가 없는 줄 안다고 했는데, 이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아, 만일 내가 이 곳을 보지 못하였다면 위태로울 뻔했습니다. 오래도록 내가 도를 아는 척 행세하여 웃음거리가 되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자 바다의 신은 이렇게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음은 그가 사는 곳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고, 여름 벌레에 얼음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음은 그가 시절에 묶여 있기 때문이오. 지금 그대는 벼랑 가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고, 비로소 그대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으니 이제야말로 큰 이치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겠소?"


望洋之歎 (망양지탄)은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감탄한다는 말로, 다른 사람의 위대함을 보고 자신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넓은 세상을 보고도 우리의 왜소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 넓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기준을 만들어 놓고 살아가는 것이다.


일찍이 서태지가 이렇게 노래했다.


"그대의 환상 그대는 마음만 대단하다

그 마음은 위험하다 자신은 오직
꼭 잘될 거라고 큰 소리로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대가 살고 있는 모습은 무엇일까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세상은 YO! 빨리 돌아가고 있다
시간은 그대를 위해 멈추어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고
그대는 방한 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지만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의 자유를 갖고 사는 시대를 만났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 교육, 그리고 사고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보이고 들리며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래전 멈춰버린 나의 시계로 세상을 보아서는 안된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던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졌던 사고방식과 같은 사고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나의 고착된 사고방식, 점점 편협해지는 관점, 한정된 시간과 공간 개념, 고상함이란 가면을 쓴 자괴감, 오래전 자취를 감춘 희망, 육체적 노화가 가져오는 게으름. 이 모든 것을 버려야만 남은 생을 끌려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방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논하지 말자.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진짜 내 모습을 나도 못 보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도 사실은 수포자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