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가 행운이 되기를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준비한다. 강아지라 하기엔 나이가 있지만 그냥 개라고 하기엔 좀 귀엽게 생겼기에 강아지라고 쓴다. 목줄을 하고 현관에 있는 작은 비닐봉지와 휴지를 챙긴다. 녀석도 기다리고 있었던지 별 다른 땡깡없이 따라나선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지하에서부터 숫자가 하나하나 늘어나는 것을 바라본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작은 공간을 휘젓고 있다. 한 손에 움켜쥔 비닐봉지, 나는 이런 비닐봉지를 볼 때마다 한 무리의 청춘들이 떠오른다. 걔들은 잘 살고 있으려나?
첫 직장이었던 의류회사는 생산된 상품을 적재해놓을 창고를 가까이 구하지 못해 도보로 20분 이상 되는 거리에 임시 창고를 얻었다. 지금이야 워낙 물류유통의 규모가 커져서 땅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서울 외곽에 거대한 물류 창고를 짓기도 하지만, 90년대 초 많은 의류회사들은 자체 건물에 창고를 구비해놓고, 영업부에서 일일이 택배로 대리점에 물건을 보내주곤 했었다.
물론 재고의 관리 또한 수기로 이루어졌으며, 하루 일과가 끝날 때쯤 대리점에서는 팩스로 그 날의 판매일보를 본사로 전송함으로, 전체적인 재고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디자인 기획실에서 근무하던 나는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재고 파악을 위해 창고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창고에서는 대리점에 보낼 상품들을 박스에 담아 차량에 싣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다. 테이핑이 된 택배 박스들이 건물 앞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 당시 내가 근무하던 회사의 브랜드는 지금으로 치자면 한때 한국 부모들의 등골을 휘게 했던 등골 브레이커 수준의 브랜드였다. 가슴팍에 커다랗게 로고가 써져 있는 캐주얼 웨어로 중,고딩들의 우월감을 적당하게 드러내면서 또래의 동질감을 이어 줄 수 있는 고가의 옷이었다. 어쩌다 운대가 잘 맞았는지 우리 브랜드는 전국적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바람에 상상 이상의 매출을 올렸고 덕분에 전 직원 모두에게 가족동반 사이판 여행이 보너스로 지급되기도 했다.
대리점에 보낼 택배 박스는 가로가 족히 1미터는 되었고, 상품으로 가득 채운 박스는 남자 직원 2명이 들어 올려야 차량에 실어 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박스엔 브랜드의 로고가 커다랗게 찍혀있어 누구든 그 박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람을 타고 흘러간 생고기의 냄새를 맡은 늑대들처럼 동네에서 쫌 노는(?) 오빠들이 쌓아놓은 박스 주변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박스를 트럭에 싣기 직전에 자판기 커피 한잔씩을 뽑아 들고 창고의 입구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우리의 시선이 박스를 떠나 시시콜콜한 잡담을 전하는 동료의 얼굴로 옮겨갔을 때 제법 등치가 있는 두 고딩이 트럭 앞에 쌓아 놓은 박스 중 하나를 들쳐 없고 뛰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마시던 종이컵을 내던지고 남자 직원 한 명이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덩달아서 다른 직원들이 따라가고 맨 뒤로 나도 따라갔다. 결말이 궁금해서 그냥 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녀석이 함께 어깨에 맨 커다란 박스가 불규칙하게 들썩들썩했다. 발맞추어 걸어도 힘들 만큼 무거운 박스였으니 빠른 도주는 언감생심 인듯했다.
얼마를 달렸을까? 아마도 그들은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이번엔 글렀어"라고 텔레파시를 누가 먼저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그 녀석들은 동시에 박스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박스를 되찾았으니 그들을 잡을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을 쫓던 남자 직원들도 달리기를 멈췄다.
판매가로 따져보자면 오백만 원 남짓한 상품이 들어있던 박스, 그 박스를 훔쳐 달아나던 어린 청춘의 버려진 희망, 그들을 쫓아가던 나의 동료들의 거친 호흡이 사그라드는 그 지점에 펼쳐진 풍경은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참하게 한쪽 모서리가 찢어져 옆구리 터진 김밥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박스에 들어있던 것은 모두 다 폴리 비닐 백이었다. 대리점에서 사용하는 비닐 쇼핑백과 옷을 포장하는 투명 비닐 백. 옷 대신 비닐백으로 가득 채운 박스는 다른 박스보다 훨씬 무거웠을 텐데...
그것을 어깨에 들쳐 매고 도망가던 녀석들은 결국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의 정체를 알진 못했지만 바라건대 잠시나마 자신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고통과 불노 소득이 동반하는 허망함이 무의식 속에 결합되기를, 그래서 남아 있는 생 동안 그런 무모하고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게 되기를 나는 바랬다.
지금도 비닐봉지를 볼 때면 가끔 그 녀석들의 무모한 행동이 떠올라 피식하고 웃곤 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나의 맘을 아프게 하는 새로운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비닐봉지계의 최약체! 바로 약국용 비닐봉지다. “내복약”이라고 쓰여있는 종이봉투를 담아주는 작고 하얀 비닐봉지, 박카스를 박스로 구입할 때 박카스 박스를 세로로 세워놓고 쓱 씌우면 딱 박카스 박스만 해지는 그 약하디 약한 봉투 말이다.
길에서, 전철 안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의 손에는 왜 그리 수용한계를 초과할 만큼의 많은 약들이 담긴 창백한 흰 봉지들이 들려 있는가?
거뭇거뭇 검버섯 핀 얼굴에 기역자처럼 흰 등으로 약봉지를 들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들을 볼 때마다 내 마음엔 어쩌지 못하는 슬픔과 막막함이 슬그머니 솟아오른다.
얼마 전 만난 박갑성 시인의 "그"라는 시를 읽고서 나는 그 아픔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박갑성-
노모의 등은 기역(ㄱ)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파란 하늘과 붉은 노을의
직선은 보지 못한다
그 시선은
돌과 흙과 풀의 가장 가까운 경계에서
일흔일곱의 생애가 영원히
유턴할 수 없는 으(ㅡ)로 지고 있다.
자음과 모음으로 살아온 노모의 삶은
훈민정음처럼 낮으면서도 찬란한 빛과 같다
영원히 유턴할 수 없는, 누군가의 생애가 지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 시간은 끊임없이 앞으로만 걸어가도록 우리를 떠밀고 뒤를 돌아보아도 결국은 생의 마지막 선을 넘을 나의 부모님, 그리고 나의 모습을 그 하얀 봉투를 통해 떠올리기 때문이리라.
내가 만약 제약회사의 사장이라면 약국에서 사용하는 모든 비닐봉지를 가장 생기 있고 아름답게 만들어 제공하고 싶다. 봉투를 보는 순간 만이라도 힐링이 되도록, 그것을 들고 다닐 때도 우아해 보이도록, 물론 그 봉투가 갖고 싶어서 약 받을 일을 많이 만들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봉투 하나를 봐도 생각이 많아지는 나이! 멍 때리러 극장에나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