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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12. 2018

다 때가 있다.

늦은 깨달음 (사진 출처 : 배민 문방구)

01. 공부의 때


"저기 원우님들... 잠시만 이리로..."


총무가 우리를 조용히 부르고,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가방에서 비밀스럽게 종이 조각들을 꺼낸다.

딱 손으로 감싸 쥘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책. A4용지를 세로로 4 등분하여 병풍 모양으로 접은듯하다.

펼쳐보니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하다. 


'풋... 커닝 페이퍼'


"우리 형님들, 일하시느라 공부 못하셨죠? 제가 그래서 여기 이렇게 오늘 예상문제의 답을 적어왔으니, 하나씩 잘 챙기시고, 능력껏 보고 잘 적으셔요.. 헤헤" 40대 초반의 총무가 가장 어린 원우다.


경영대학원, 그것도 특수대학원에 개설된 MBA 과정, 나이 지긋하신 CEO, 자영업자, 회계사무소 직원, 기업 HRD 담당자, 연구원, 강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학력과 네트워킹을 목적으로 모여있는 곳이다. 

업무를 마치고 저녁에 진행되는 수업은 대부분 형식적이었고, 나아가 수업시간의 일부는 저녁 먹는 시간, 회식을 위해 이동하는 시간으로 쪼개어졌다. 그럼에도 학과 시험은 물론 영어시험, 졸업시험까지 치러야 할 관문은 일반대학원 못지않았다.


대부분의 원우들에게 성적이 그리 중요하진 않았지만, 시험이 주는 부담감은 어릴 적 그대로인 듯했다.

시험장에 감독관으로 들어오신 교수님과 조교 몇 명은 그저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애써 자연스럽게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 잘 알아서 시험에 임하란 무언의 메시지... 큭


빠르게 시험을 마친 한 두 명이 강의실 밖으로 나가고 먼저 나온 사람들은 같은 과 원우들을 기다리며 자판기 커피 한 잔씩을 빼들고 서 있었다.  잠시 후 시험장을 나온 사람은 가장 나이가 많으신 우리 기수의 회장님


"오! 회장님! 벌써 다 쓰고 나오셨어요? 커닝 페이퍼 덕 좀 보셨어요?" 


멋쩍은 웃음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회장님.


"아이고.. 역시 공부는 젊었을 때 해야 해... 총무가 만들어준 커닝 페이퍼 말이야... 보여야 말이지

그게 은밀하게 보려니 영 보이지가 않더라고. 다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공부들 열심히 하셔! 허허허!"


어른들이 말하길 공부도 때가 있다 하셨다.

'그때'란 노안이 오기 전을 말하는 거였다. 


02. 취향의 때


드리퍼로 내려마시는 커피와 커피메이커로 내려마시는 커피는 갈린 원두의 입자 크기가 다르다. 

비싼 에스프레소 머신도 보급형 캡슐 커피 머신도 좋지만 커피 좀 안다는 사람들은 드립 커피를 즐긴다고 한다. 

그게 뭐가 달라 라고 말했다가는 저렴한 초등학생 입맛이라 그렇다는 핀잔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날 드립 커피 내리기에 도전했다. 싱크대 찬장 한 구석에 드립퍼가 굴러다니던 것이 기억나 친구가 자주 들린다는 커피 원두 집에서 원두를 사 가지고 왔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드립퍼의 종류도 다양하고, 금액도 다양했다. 또한 그동안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드립퍼 안쪽의 기다란 돌기 또한 커피를 최대한 맛있게 추출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진출처 pixabay.com


그동안 내게 찬밥 신세이던 드립퍼를 꺼내 들고 자세히 살피니, 과연... 기다란 돌기와 2개의 구멍이 보인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님은 "아는 만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조금 전까진 그냥 플라스틱 깔때기 같았던 드립퍼가 왠지 세련되고 멋진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핫 아이템처럼 보였다.  


맨 먼저 드립퍼의 진열위치를 바꾸었다. 아파트로 치면 로열층. 싱크대 찬장안에서 손이 쉽게 가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식기들이 놓여있는 층으로 드립퍼를 이사시켰다. 


원두와 함께 사가지고 온 거름종이 (표백제를 쓰지 않았다는 문구로 나를 유혹한) 드립퍼에 끼우니 흡사 버버리 코트를 입은 레트 버틀러 같다.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에 의하면 드립 커피를 마시기 위해선 물을 따르는 주전자도 달라야 하는데, 주둥이가 가늘고 긴 주전자로 아주 천천히 물을 통과시켜야만 한단다. 그러고 보니 예전 "커피 프린스"의 마지막 장면이 이탈리아에 유학 가서 바리스타가 되어온 은찬과 한결이가 드립핑 대결을 하는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도대체 몇 년 전이냐...) 꽤 긴 시간 동안 둘이 히히덕거리며 드립핑을 하더라.


준비 완료! 맨 마지막으로 실제 드립핑을 하는 동영상을 마스터한 후, 도전! 

동영상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한 내용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가르치듯 중얼거린다. 


"처음엔 한 두 방울 물을 떨어뜨려... 간 원두에 거품이 일어나게 하며 천천히 전체를 적시는 느낌으로...

그렇지. 천천히... 공을 들여서... 커피 마시는 일은 예술이라고!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갖는다는 게 쉬운 거겠어?"


드립퍼를 받치고 있는 커피잔을 들여다보니 아직 바닥엔 검은 물방울 몇 개만이 떨어져 있다. 


"계속 더 부어야지... 그렇지 천천히... 천천히"


조급증이 밀려왔지만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드립핑을 한다.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질 때 커피잔은 3분의 1쯤이 채워졌고 주전자를 들고 있던 팔 엔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오른쪽 팔의 절대적 근육량 부족에서 오는 짜증스러운 피곤함. 


"아.. 팔 아파서 커피도 못 마시겠어! 이 나이에 뭔 청승이야! 그냥 캡슐 꽂아서 쭈르륵 나오는 돌체 구스토가 나한텐 딱이야!"


모든 일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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