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어쩔 수가 없다

by 인솜니 lamiremi

스포일러 워닝: 이 글에는 영화 <어쩔수가 없다>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다. 젊었을 때부터 여기저기서 훌륭한 작품이라고, 위대한 작가라고 우러러 마지 않는 소리가 많은 소설이라 읽으려고 했었으나 어떻게 하다보니 안 읽고 미루고 하다가 이제야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에 대한 글을 읽다 말고 뽐뿌를 받아 덜컥 샀다.


그런데, 나는 막 재미있지가 않다. 좀 불쌍한 남자다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1920년대 미국의 광란의 시대에 대한 향수도, 매주 모르는 사람들을 잔뜩 불러서 파티를 하는 졸부의 플렉스도, 한 여자만을 바라보고 자기 인생을 돌진하고 성취하고, 모든 것을 그 여자 발 밑에 갖다 바치는 남자의 순애보도 그다지… 와닿지를 않았다.


아마도 내가 이 나이에 읽어서 그런것 같다. 사랑도,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고 갈망하고 이루지 못할 욕망에 좌절하는 달콤하고도 씁쓸한 멜랑콜리도, 자신을 던져 사랑하는 어리석음 따위도 더 이상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생을 낭비하고 목숨을 낭비하는 호기로운 정열 따위, 그다지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더이상은, 내가 그러한 간절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젊지 않아서 그렇다.


남편과 <어쩔수가없다>를 보러갔다. 박찬욱 감독을 30년 전부터 좋아했지만 점점 멀어지다가 최근 <헤어질 결심>에서 좀 다시 좋아져서 보러갈까 싶었지만, 요즘엔 내가 잔인한거를 싫어하기도 하고, 또 왠지 너무 대중적인 코메디를 누추하게 하는것 같기도 하고 이병헌도 마음에 안 들고 해서 고민하다가, 이 영화가 자기 분야를 이룬 중년남성들이 맞딱드리는 삶의 위기에 대한 처절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평들을 보고 남편을 위해서 보러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와 진솔한 대화를 노력해볼 생각이었다.


영화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더이상 잔인한 것, 무서운것, 파괴적인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오로지 돈을 많이 벌 생각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기계화에 밀려나 대량해고되는 너무나도 ‘평범한 악’에 저항하는 너무나 잔혹하고 기발한 대응이 좀 억지스럽게 느껴져서인가.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너무나 잔혹하고 기발한 악에 대항하는 처절하고 스타일리쉬한 복수가 어떤 멋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비대칭이다. 자기를 내친 자들에게 복수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자기가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죄없는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잔인함이라니, 삶의 페이소스를 말하기엔 모자라보였다. 꾸역꾸역, 우리가 목구멍에 우겨넣는 삶이라는 것과 닮은 구석이 조금 있기는 한것 같지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단지 주인공에게 공감할 수 없다는 이야기인것 같다. 똑같이 해고된 처지인 첫번째 희생자의 아내가 하는 말이 정답이다. 어차피 재취업해도 7, 8년 일하고 나면 정년퇴직할건데, 우리 아빠가 까페 차려준다는데 백세시대에 이제 새로운 직업을 모색해야지, 니가 쌓아둔 엘피판과 오디오 취미 살리면 되잖아,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오로지 나의 자부심, 나의 자아, 나의 아집 때문에 이제까지와 같은 일, 같은 자리를 희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남자는 모든 답과 도움을 들고 있는 아내를 거절하고 자기연민에 빠져있다가 처단을 당하고, 다른 남자는 오로지 내가 성공하기 위해 다른 이들, 나보다 더 뛰어나며 그래서 내가 원하는 자리를 얻을 자격이 있는 이들을 죽인다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다.


처음의 살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발적인 여러 운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희생자의 아내가 남편의 목숨보다 더 중요시했던 가치를 그 남편이 저버렸고, 아내가 남편을 벌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부부가 나오는 부분, 그 일촉즉발의 살해시도와 격투장면, 한적한 산자락에서 벌어지는 중년부부의 스토리들은 굉장히 재미있었다.


일단 한번을 성공하고 나니 두번째부터는 그냥 살인이 가능하다. 그때부터 메슥거리기 시작해서 시신을 분재하는 장면까지 가자, 그리고 세번째의 그냥 잔인한 자세한 살인묘사까지 가자 아 내가 왜 이것을 보러왔을까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내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을 내 영혼에 상처를 주는 일을 왜 나는 사서 하고 있을까? 왜 예전에는 똑같이는 아니지만 잔인한 영화들을 보며 재미있다고 여기고, 시원한 쾌감을 느꼈었을까? 왜 지금은 아닌가? 예전에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들을 봤을 때는, 그 잔인함과 그 스케일에서 오는 어처구니없는 의외성이 쾌감을 주고 숭고미를 지녔다. 지금은 그저 잔인하다. 거기서 걸려서 더이상 들어가기가 싫다. 애를 낳고 나서부터 생긴 변화인데, 애낳고 몇년 지나니까 다시 약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의 기본 베이스가 비폭력으로 바뀌어버린 것 같다. 요즘엔 고기도 못 먹게 되어버렸다. 나의 사상은 채식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데, 나의 몸은 제 먼저 저 멀리 가버렸다.


남편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영화를 보기로 해서 아쉬운 선택이 된 것 같다. 내가 일부러 영화 끝나면 할 일 있다고 약속 있다고 도망가버리는 그의 습관을 차단하기 위해 끝나고 차마시며 영화얘기할 시간까지 미리 예약해놓고 세팅을 했건만, 남편은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중년남성들이 맞닥뜨리는 삶의 위기에 대한 ‘처절한’ 공감따위는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자기도 ai 시대에 큰 위기를 맞고 있지만 자기는 가능한 길을 찾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는 지금까지 하던 분야가 아닌 전혀 다른 일, 육체노동을 할 생각은 안 해보냐고 물었는데, 내가 무슨 육체노동을 하냐, 계속 해오던 사람들이랑 경쟁이 되냐 하면서 아예 생각도 하지를 않았다. 미리부터 패배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지를 않는 아주 강한 자아였다. (찐육체노동이 아닌 서비스업까지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플랜비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는 것 같다.)


꺾이지 않고 치열한 모색을 하겠다니 안 꺾여서 다행일 수는 있는데, 꺾이지 않는 것이 꼭 좋지만은 않다는 것이 결혼생활에서 계속해서 내가 깨닫게 되는 사실이다… 남편이 스스로를 접어주고 여자말을 따라주지 않으려고 들면 정말 힘들고 어려운 것이 대개의 결혼생활이다. 타협이 안 된다는 것 자체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것이기 때문이고, 또 보통은 여자말이 옳기 때문이다. 첫번째 희생자 부부처럼. 나는 벽을 느꼈다.


그리고 보면 영화에 나온 실직자 3명이 모두 아내를 사랑하고 가족을 지극히 아끼는, 한국의 중년 남성치고는 보기 드문 애처가 타입이라는게 그들의 아집을 용서하게 만드는, 거부감을 약화시키는 설정인것 같다. 거기서까지 아집을 부렸다면 정말이지 구제불능이라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집이라고 했지만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고, 그것을 꺾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아직까지는. 단지 내 앞의 경쟁자들을 치우기 위해 그들을 없앤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거나 더이상 내가 어찌할 수 없다고 자기연민에 빠져 술로 허송세월을 하거나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남편의 경우와 다른것은, 나는 지난 20년 동안 내가 잘 하고 하고 싶은 일을 발전시킬 기회를 아이들을 키우고 이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이 날리고 매몰시켰기 때문에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잘 하는 일을 분리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만큼 버리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사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 아주 처절한 몇년을 보내고서야 겨우, 어쩔 수 없이 노화하는 내 몸을 받아들이고서야 겨우 했다. 눈이 나빠져 책읽기도 피곤해지니 내가 뭔가 새로운 분야를 배워서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쭉쭉 내려간다. 뭔가를 조금만 많이 해도 피곤하고, 오늘 무리하면 반드시 내일 역습을 당하니 이 일 어떻게 잘 하면 되겠는데, 같은 만용이 불가하다.


그런데 영화의 ‘가장’들은 그것이 자기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들은 그것을 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저항하고 있다. 내 남편도 몸소 겪는 질환과 노화에도 불구하고 전혀 꺾일 마음이 없다. 남자라는 종특인건가. 죽으면 죽었지, 죽이면 죽였지.


영화 서두에 나오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의 애절한 선율은 삶의 어쩔 수 없음, 나의 어쩔 수 없음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슬픔이라고 생각된다. 박찬욱 감독이 음악은 참 멋드러진걸로 잘 찾아붙인다. 그런데 그 좋은 곡에 기대어서 그냥 젖어들기엔 도저히 소화될 수 없는, 삼킬 수 없는, 억지스러움이 불편하고, 불편하다.


분재라는 취미가 살인의 기술로 변모할 때, 만약 식물의 자연스러운 생명력을 꺾고 짓눌러서 인간의 계획과 이상에 종속시키는 분재 행위의 측면이 주인공이 살아가면서 노동하면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체화되었다는 서사가 잘 깔려있었다면, 한낱 고깃덩어리로 떨어지고 마는 인간의 존엄성에 경악하고 메스꺼워지는 일은 좀 완화되었을 지도 모른다. 어떤 연민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상대를 분재로 만들기 전에 이미 내가 분재로 되어가고 있었다면.


주인공의 범죄를 알게 되고도 그것을 덮어주는 아내의 마음도 영 이해가 안 갔다. 사람 죽인 남자와 어떻게 같이 살겠다는 건지, 사랑이 그렇게 중하고 내 아이 내 가정을 지키는게 그렇게 중한가? 난 아닌것 같다.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흔히 비범하고 기발한 선택을 하긴 하지만, 뭐 그렇게 기발하지도 않고 거의 클리쉐처럼 느껴지는 억지스러움이었다. 오로지 남자의 해피엔딩을 위한.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먹는 해피엔딩은 아주 정직하고 섬뜩했다. 추구하던 가치도, 삶의 기본으로 지키던 도덕성도 다 버리고 받은 삶은 아주 외롭고 건조한 노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한다. 자기의 자아를 버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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