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른 지하철을 타려고 가는 길이었다. 시끄러운 지하철의 소음과 번잡함에서 나를 차단하기 위한 고성능차단기-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뒤집어쓰고 약속 시간에 늦을까 얼른 가는 길이었다.
외국인 젊은애가 보였다. 밝은 금발에 얼굴은 백인들이 흔히 그렇듯 흰게 아니라 분홍색인, 말갛고 화장도 전혀 하지 않은 스무살 될까 말까한 어린애였다. 흘깃 쳐다보며 참 분홍색이구나 하고 지나가려는데, 그런데 나를 부른다. 혹시 길을 물으려고 하나 싶어서 얼른 뒤집어쓴 헤드폰을 벗었다.
그런데 엉뚱하게 앞에 안고 있던 왠 종이상자를 조심스럽게 열더니 꽤 유창한 한국어로 자기는 우크라이나 사람이고 전쟁으로 힘든 고국의 사람들을 위해 모금을 하고 있다고 했다. 상자엔 알록달록한 슬라브풍의(용서하기를 바란다. 러시아 마트료슈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키링 같은 작은 기념품들이 들어있었다.
순간 너무 안 된 생각이 들어서, 그 기색을 감추려고 ‘우리말 잘 하시네요’ ‘우리말? 한국말이요!’ ‘네, 어디서 배우셨어요?’ ‘연세대 어학당 다녀요’ ‘아, 연세대 어학당, 거기 최고죠!’ ‘어떻게 아세요?’ ‘아 잘 알죠’ 엉뚱한 대화를 이어갔다.
연세대 어학당 갈 정도면 정말 공부도 잘 했을텐데, 훌륭한 인재인데, 나라가 전쟁 나서 망하니까 공부에 전념하지도 못하고 고국의 친지들과 나라 걱정에 몇푼이라도 모아서 보내겠다고 거리를 헤매고 있다니…
만약 우리나라에 전쟁이 터져서 북조선이랑 싸운다면, 만약 운좋게 우리 아들이 어떻게 징집을 피해 해외로 도피할 수가 있다면, 그애도 어느 평화로운 민주주의 국가에서 남의 나라에서 이렇게 조바심치며,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마음씨 좋아보이는 중년여성들을 찾아서 기념품을 팔고 모금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생각이 들어서…
옆에서 왠 차가 지나가면서 운전자가 우크라이나 소녀에게 ‘명함 없어요?’ 묻는다. 명함을 못 알아듣는거 같아서 ‘Name Card?’ 나도 끼어들었다. 아까 기념품은 이미 샀고 명함을 달라고 한다. 없다니까 전화번호라도 알려달란다. 나중에 더 도와주려고 하는걸까? 혹시라도 나쁜 의도가 있지는 않나(한국 중년남성의 윤리성 하위 30%치들은 정말 못 믿을 사람들이라는, 보수적으로 판단했을 때 매우 합리적인 의심이 있긴 하다;;) 말투가 좀 거친것 같기도 하고, 걱정이 되긴 하는데 바로 옆좌석에 부인인 듯한 여성이 앉아있는걸 보니 괜찮을것 같기도 하고, 나도 전화번호를 물어야 할까? 나는 이 아가씨를 어디까지 도와주고 싶은걸까? 모르겠다. 이 인연은 여기까지로 하고 아무튼 나는 돈을 내고 내가 고른 키링을 받아서 갈 길을 갔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계속 생각이 난다.
전쟁은 정말 끔찍한 것이다. 우리 엄마와 아빠가 바로 어렸을 때 6.25 전쟁을 겪은 분들이다. 어려서 일이라 그렇게 또렷하지는 않은것 같지만, 그분들이 가슴 속에 상시적으로 깔고 있는 불안이 우리들에게 들어와서 우리는 이유도 모르고 불안하다. 나는 우리 세대에 만연한 우울과 불안이 그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평생 전쟁을 못 겪어본 채 늙어가는 인간들이 권력을 잡겠다고 북한과 전쟁도 불사하려는듯 망발을 하면서 (이웃의 대만은 전쟁이 날지도 몰라도 우리는 절대 전쟁이 날 리가 없다는 막연한 확신으로) 나라의 앞날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정말 그들은 모른다.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내 곁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삶이란게 어떤 것인지. 혹시라도 전쟁이 나면 자기들은 미국으로 도피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 해외 은행에 돈이 있으니까, 미국에 친척이 있으니까, 자식들 유학 시켜놨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의 만약에라도.
요즘 신문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우크라이나, 가자, 시리아, 미얀마, 계엄과 내전 상황, 영남 산불… 제주항공과 이태원은 이미 잊혀졌다ㅜ; 그 소식을 듣는 마음도 내상을 입는다. 우리는 과연 인류의 멸망을 막을 수 있을까. 국민의 70%가 기후위기 대응을 원한다는데 왜 그것을 정치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걸까. 사악한 자들 때문인가. 악의 평범성 때문인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가설은 틀린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사악한 소수의 파괴력 때문에 그리고 평범한 우리가 속아넘어갔기에, 너무나 쉽게 속아주었기에 그런 일은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자신을 알지 못 하기 때문에 속아넘어간다. 무관심하기 때문에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