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로서, 한 음악인으로서
함께 하는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듣는 즐거움이 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의 데모를 듣는 특권을 누린다. 녹음이 되어 빛을 볼 준비를 하고 있는 곡들도 있다. 싱어송라이터들과 재즈연주자들의 음악을 듣노라면 절로 행복해진다. 자신의 노래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처럼 놀라운 일이 있을까. 분명 음악이란 재능은 세상을 밝게하고 사람들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원래 음악은 듣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는 것이었다. 직접 훌륭한 음악가의 소리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지 않으면 확인할 수도 놀라움을 경험할 수도 없는 것이고, 모바일로 보는 것 역시 그런 음악의 기본 특징이 고스란히 베어있다. 그리고 음악은 기본적으로 시간예술이다. 특정한 공간에서 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 시간의 분절 속에 다양한 표현이 드러나고 저음부터 고음의 균형 혹 불균형이 긴장과 완화를 이루며 우리를 감흥시킨다.
지금의 대중 음악은 3분 40초 정도 전후로 만들어서 빨리 사람들에게 강렬함을 선사해야 한다. 미리듣기 서비스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주도 짧아졌고, 간주에서 후렴멜로디를 솔로악기가 연주하는 것은 실로 유치한 편곡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들의 귀에 다른 음원보다 더 솔깃하게 들리기 위해 과도하게 화사하고 밝게 작업을 한다. 어제 한 유명한 국내 싱어송라이터의 노래를 들었다. 그의 투박한 기타와 저음 보컬 위에 풀 오케스트라 편곡과 연주를 얹은 곡이 너무 아름답고 좋았지만, 너무 밝고 자극적으로 들렸다. 계속 돌려 들을 수 있을까. 우리 귀를 혹사시키는 사운드를 나도 엄청 추구하고 있는거겠지...
그러다 Melody Gardot의 몇 년 전 노래와 라이브를 듣는데 따뜻하고 질리지 않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음악적이란 말이 충분히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스티비원더의 어떤 곡은 드럼이 아예 한쪽 귀에서만 나오는데도 충분히 음악적이다. 실로 이 지점에서 고민이다. 이런 숙고들을 충분히 하면서 여유있게 하지만 정말 섬세하게 만들고 싶은데 그런 장인의 깊이는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이고, 조급함을 채울 시간과 재정의 여유도 부족하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조바심은 가득하고 실력의 부족은 바짝 혀를 마르게 한다.
그런 음악을, 그런 소리를 찾는 이유는 무얼까. 그런 잘 만든 음악을 들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감흥이 정말 치유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리움과 따뜻함, 추억과 배려 등을 음악을 통해 느끼고 경험하고, 날카로움은 부드러움으로, 어리숙함은 선명함으로 바뀐다.
전주가 길고 간주가 길고 디테일이 끔찍하도록 정교하면 어떤가. 좋으면 그만이다. 그 좋음은 충분히 음악적이면서 충분히 철학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클래식이든 재즈든 록이든 어떤 음악에도 적용된다. 음악친구들의 음악을 들으며 그런 것을 기대하고 그런 것을 느낀다.다만, 내가 도울 역량의 한계를 다소 느끼기에 어떻게 하면 뛰어넘을 수 있을까 고민이 깊다.
원석같은 이 노래들, 대중의 사랑도 받지만 정말 스테디하게 갈 노래들로 빚어지길 기대한다. 정말 부족함을 느끼기에 치열하게 잘 하겠다는 다짐과 더불어 이 영역만큼은 실로 오랜만에 절로 기도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