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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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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eyuun Feb 23. 2024

그림 그리는 마음

작년부터 틈틈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년엔 대학원 논문을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한 이벤트였기에 상반기엔 내 진짜 열정은 잠시 잠재우고 아주 가끔만 그렸다.


하지만 특정 그림체와 스타일이 없는 상태, 충분한 실험적 스케치 과정, 재료와의 놀이, 대상을 정말로 제대로 볼 심적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가끔 그리는 그림의 결과물은 늘 예상처럼 성에 차지 않았고, 무엇을 그릴지 정하는 것조차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취미로 그리는 건데 스트레스까지 받으면서 할 필요가 있나 싶어 또 한동안 안그리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그림을 놓고 싶진 않았다. 그림으로 돈 벌 생각은 없지만 좋은 그림들을 보면 그 자체로 감상하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도 저렇게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드는게 걸렸다.


그림 실력이 늘만큼 물리적인 노력을 들이지 않고 그림이 자연스레 잘 그려지길 바라는 것은 나의 욕심이었다. 나는 나름 흡족할만한 그림을 완성하는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두고, 과정에 있어서 면밀하게 고민해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자꾸 눈이 가는 그림, 선이 몇개 없지만 대상을 아주 훌륭하게 표현해낸 그림들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스케치, 다양한 선들의 실험, 대상을 충분히 보고 느꼈던 감각들을 구체화하려는 의도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과정이 많은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여러 망친 그림들, 그리다만 밑그림들이 채워진 너덜너덜한 스케치북 없이는 매번 그럴듯한 완성작을 그려내기 어렵다.


평상시에도 자주 그리지 않던 사람들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어떤 스타일의 선, 어떤 색상을 배합하여 내가 의도한 효과를 나타낼지 즉각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기에 충분한 훈련이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매번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싶은 완성된 그림을 그리려 할 때, 하나하나 결정해야 할 것이 많고 고민이 깊어지니 그리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다음에 또 그릴 엄두가 쉽게 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림을 그리는 건 나에게 풀어야할 숙제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어쩌다 그림이 잘 그려지면 동네 방네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기쁘지만 그리려고 하는 느낌을 어떻게 그려내야할지 감도잡히지 않을 때는 괜히 재료 탓을 하거나 쉽게 포기하곤 했다.




올해는 그림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바꿔보려한다.

완성된 그림을 만들어가는 것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즐겨보는 것이다.


예전엔 어떻게든 1일1그림을 해보겠다고 아이패드 드로잉으로 휙휙 그려 완성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면,

요즘은 디지털 일러스트에는 흥미가 사라지고 연필이나 펜, 수채화나 과슈를 이용해 종이에 직접 그리는 것이 더 큰 만족감을 준다.


그리고 완성된 그림을 한달에 한번 그리는 것보다는 완성되지 않은 낙서 같은 스케치일지라도, 하루 10분정도만 할애해서 매일 그리는 것이

그림 실력 향상에는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릴게 없더라도 눈 앞에 보이는 아무 사물이라도 그려보거나 하다 못해 내 손을 그려도 좋다.


매일 스케치를 하는 습관은 그림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는듯하다. 대충 그린 그림이어도 좋다. 때로는 힘을 완전히 빼고 낙서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

각 잡고 재료를 다 갖추고 만반의 준비를 해서 그리는 그림보다 더 결과물이 좋을 때도 많다.

재료를 갖추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지는 말자. 물론 전문가의 실력이라면 좋은 재료가 큰 차이를 가져다 주지만 그림그리는 습관을 만드는 단계에서는 오히려 너무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그림 그리는 것의 본질을 잊게 만든다.


그림은 내가 하루종일 일하고 나서 나만의 시간과 나만의 공간에서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고 존재하게 도와주는 훌륭한 명상 도구이다.

나는 요가를 하면서 가끔 명상을 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그림만큼 좋은 명상도 없다.

명상이 끝나면 남는 것도 있어서 더 좋다 (^^).




그림을 그리는 것도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림도 근육을 단련하듯이, 제대로된 노력을 꾸준히 들이면 실력이 향상되는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하고, 내 감각에 더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표현하고자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다.


포기하는 것은 쉽다. 노력하지 않아도 되니까.

정말 좋아하는 것이라면 내게 당장 눈에 보이는 재능이 없어보여도 용기내어 계속 쫓으라고 내 자신에게 자주 말해주고 싶다.

포기하면 지금 상태 그대로이지만, 노력하지 않아도되서 편안하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린다면, 그림 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분야에서든

성급한 결론을 짓는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계속 기회를 주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분명한 건 무조건 성장한다.


세상에서 추구할 가치가 있고 정말 좋은 것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쉽게 얻어진다면 기분이 잠깐 좋겠지만 금새 그것의 가치는 잊혀질 것이다.


나의 감정과 내면을 의식적으로 바라보고 어떤 형태의 언어로든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은 추구할 가치가 있고,

힘들고 오래 걸리더라도, 내가 바라는 결과를 얻지 못할지라도, 내 의도 자체에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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