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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eyuun Dec 24. 2023

브라이언 레 : LOVE STORIES 전시를 보고

사랑의 언어


이번주 토요일의 계획은 요 몇 달간의 여느 토요일 오후처럼 도자기 물레클래스를 가는 것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와 시간이 붕뜨게 되어 문득 한 달 전 예매해 둔 브라이언 레 작가의 전시가 생각났다. 전시 장소인 잠실 소피텔 호텔은 공방과 같은 방향이기도 해서, 수업에 가기 전 30분 정도 빠르게 훑어보고 나오기로 생각하고 발걸음을 바쁘게 움직였다.


빠르게 훑어보고 가려했는데, 뉴욕타임스의 '모던러브'라는 칼럼 제목과 그림 캡션을 찬찬히 보다 보니 그림 하나하나 대충 보고 지나갈 수 없는 강한 매력이 느껴졌다. 선생님께 연락드려 다음 주에 공방에 가겠다고 하고, 그때부터 그림 하나하나를 내 눈에 넣겠다는 의지로 감상을 해보았다. 거의 두 시간가량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몽글몽글하고 따듯한 기분에 녹아들었다.


 

  브라이언레는 모던러브 칼럼에 10여 년간 삽화를 그려온 일러스트레이터이다. 다양핰 사랑이야기들을 접하고 그림으로 표현해 내며 그는 저마다의 사랑 이야기의 생김새는 다르지만 사랑은 국경을 불문하고 우리 모두를 이어주는 것이고,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연결을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고 한다.

  각자의 상황을 세세하게 보면 사랑의 모양, 언어가 다 다르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도 전부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은 '사랑'을 필요로 하고, 사랑은 때로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우리는 또 연결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 한 것 같다.


I've Got You.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사랑을 주제로 한 전시지만 수많은 그림 중 하트가 있는 그림을 보지 못했다. 하트는 사랑의 심벌로 보편적으로 사용하지만 상징성이 너무 강해 각 러브스토리의 맥락과 디테일을 섬세하게 표현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을 것 같다.



요즘 나는 연애세포가 많이 사라지고 메말라 있는데도 사랑 이야기들에 공감되고 마치 내가 경험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헤어지고 난 뒤 새로운 사랑을 찾는 이야기, 사람들과 섞이고 싶지만 소심한 성격을 고치고자 연말 포옹 파티에 간 이야기, 남극처럼 인구가 드문 곳에서 뜻밖에 찾은 사랑 이야기, 생활습관이 다른 남녀가 같이 살며 서로 맞추려 노력하는 이야기, 국경을 넘나드는  장거리 연애의 고충 이야기, 반려견과의 사랑 이야기,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이야기 등 정말 넓은 스펙트럼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관심 있게 보다 보면 마냥 해피한 사랑 이야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사랑을 할 때 따르는 크고 작은 불편함과 고통 등 디테일한 인간 심리에 대한 묘사들이 정말 기발하다고 생각됐다.


사람들의 얼굴이나 사물 등을 세밀하게 그리지 않아도 전체적인 구성과 여백, 컬러로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선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심각하지 않고 재밌고 유쾌한 그림이 많아 그림을 보다가 육성으로 ‘귀여워!!’라고 한 전시는 처음인 것 같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비슷했다. 그리고 그림을 보고 있는 나 자신이 마치 이 다양한 러브스토리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따듯했고, 그림 안의 사랑스러운 인물들 앞에 더 머무르고 싶었고 그들을 더 알고 싶어졌다.


  

  브라이언레의 인터뷰 영상중, 그는 마치 관람객의 손을 잡아주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그렸다고 한다. 사랑 때문에 우리는 아파보았고, 사랑을 위해 무언가 포기해 보았고, 갈등해 보고, 또는 사랑을 찾기 위해 노력해 본 경험들이 있다. 사랑은 행복한 순간도 있지만 시험에 드는 순간들도 많다. 각자 다른 이유로 힘들어봤거나 아직도 상처에서 회복 중이거나, 외로워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을 의도했다고 한다.



  다양한 스타일의 그림들을 보다 보면 결국 아이디어가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림의 스타일과 매체는 그림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스토리텔링 방식 및 표현하고 싶은 감정에 따라 정해진다. 어떤 순간을 어떤 식으로 보여줄 것인지 아이디어를 무에서 갑자기 떠올리는 것은 어렵다.

  칼럼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해석해서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에세이의 핵심 포인트를 끄집어내어 감정을 더 극대화시키거나 더 많은 해석의 여지가 있는 시각화 작업은 그림 테크닉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삶의 작은 순간들을 관찰하는데서 오는 것 같다.



브라이언 레의 그림은 그 특정 사랑 이야기에 대해 모든 세세한 내용을 묘사하진 않지만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들을 골라서 그 상황의 본질을 나타냈던 것 같다. 아직 관계의 갈등이 해결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고 앞으로 남은 숙제와 정말 중요한 건 무엇일지 생각하게 만든다.


나도 요즘은 단순히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것보다 나중엔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해 주는 색감과 구성, 그리고 상상력을 동원한 그림들을 그려보고 싶다.


그림 자체도 정말 좋았지만 생각을 많이 하게 해주는 전시였다. 어떤 면에서 굉장히 시적이고 철학적인 그림들이다. 행복에 필요한 것인 사랑을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결점과 문제들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포용하며 그럼에도 함께 상생해 나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 성숙한 사랑을 해본 경험이 없었던 것 같다. 사랑을 하기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용기, 나의 예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수용할 줄 아는 용기, 상대방 앞에서 언제나 완벽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 두려움을 내려놓고 진정 나 자신을 보여줄 용기.


연인과 함께, 가족과 함께 보러 와도 좋고 혼자 와서 사랑에 대한 사색을 하며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전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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