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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교동방울이 Aug 27. 2021

'가짜'와 '프레임' 사이

사실이 빗발치는 전쟁터에 나서는 자세

니 오만한 펜이 심장을 찌를 날이 올 것이다.


내 주위에도 시간에 쫓겨 단편적으로 기사를 읽는 이들이 많다. 포털에 뜬 '많이 보는 뉴스' 중심으로 하루 5개 안팎을 읽는 사람들이다. 신기하게도 반응은 비슷하다. "기레기가 참 널렸다"는 것. 가짜 뉴스가 너무 많다고 한다.


바로 잡았으면 좋겠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가짜가 아니라 '프레임 뉴스'다. 같은 사안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기사 톤이 달라진다. 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이미지가 천양지차다. 제목의 마술 또한 가미된다. "컵에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 "물이 반이나 있어!" 우악스러운 헤드라인 분위기가 본문을 잡아먹는다.  


"현장의 혼란을 너무 부각하지 말 것"

"좌충우돌 에피소드 놓치지 말고 담길"


지난해 봄. 하나는 내가 몸 담았던 곳의 데스크, 하나는 친한 타사 선배가 받았던 지시다. 뭐가 내 것이었냐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사안을 대하는 방식이 언론사 성향에 따라 다르다는 거다. 당연히 한쪽은 현장을 드라이하게 담았을 테고 하나는 좌충우돌, 즉 혼란을 부각했을 거다. 같은 장소의 기자 둘이 다른 안경으로 사건을 봤다. 


여기서 '기레기론'은 무럭무럭 자란다. 독자들은 자기 생각을 바탕에 두고 읽는다.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다. 혼란을 싫어하는 이에게는 '좌충우돌 혼란 부각 기사=기레기' 논리가 성립된다. 저쪽은 있던 일을 잘 담아 썼는데 왜 너희는 문제를 끄집어내냐는 식이다. 생각해보면 동료 중에 진짜 기레기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독자들이 체감하는 기레기의 숫자가 엄청난 건 이 때문이다. 


가족들에게도 부탁한 적이 있다. 차라리 신문을 골라서 읽으라고. 생각이 다르다고 해 기레기가 아니라고. 재계의 입장으로 보고 싶으면 경제지, 소수자의 이야기나 인권 이야기를 더 많이 보고 싶으면 진보(?)지, 여당이 싫으면 조중동을 읽으라고. 차라리 그게 더 속 편하게 세상을 보는 방법일지 모른다. 혼란을 보고 싶은 사람이 있고, 있었던 일 전체를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선택의 문제다. 기자는 속기사가 아니다. 현장을 사진 찍듯 복붙하는 이는 없다. 자기만의 해석을 담아 쓴다. 독자들의 생각에 확신을 더한달까. 언론의 숙명이자 의무기도 하다. 기사는 '문제의식'으로 시작해 '편집'으로 끝나는 글이라서다.


그래서 프레임이 옳은 거냐고? '필요하긴 하지만 바람직하진 않다'가 내 답이다. '다른' 게 '틀리다'고 인식돼 기사의 믿음을 낮춘다. 프레임이 가짜라는 이름에 잡아먹히니 잠 줄이며 노력하는 진또배기 기자들도 가짜 뉴스 공장장이 돼 버린다.


그래서 나오는 게 정론직필지의 필요성, 투명하게 사안을 보는 신문이 있어야 된다는 거다. 아쉽게도 정말 가운데에 자리한 언론은 없는 것 같다. 속보를 팍팍 쏘는 통신사를 보는 것도 한계가 있다. 통신사가 중립적이란 건 편견이다. 앞에 말한 지시 두 가지 모두 통신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편집국의 입김이나 사주의 요청 등 정파성이 들어갈 여지는 무수히 많다. 


그럼 어떡해야 하나. 최소한 팩트만은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 특히 트래픽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 얼마 전 그룹 EXO의 크리스가 감옥에 갇힌 것으로 보이는 사진 기사가 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도는 사진을 썼다. 출처는 불명확했고 공안 측도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허나 이미 트래픽을 배불리 먹은 뒤라 사실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적어도 이런 기사는 안 나와야 한다. 언론사도 기업인지라 사익추구는 자유다. 단, 정 트래픽을 받고 싶으면 '크리스 감옥 사진, 진위 논란'정도로 톤을 낮춰야 했다. 


질문을 하면 무례하다고, 가만히 있으면 쫄보라고, 그냥 서있어도 빳빳이 목을 쳐들고 다닌다고 욕먹는 게 기자들의 오늘이다.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앞에서는 땅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겸손할 것. '거짓일까?'가 머릿속에 남으면 이미 죽은 글이다.


욕심이 있다. 독자들의 생각도 바뀌었으면 한다. 왜 현장을 가지 않냐고 묻지만 당장 자신을 취재하겠다면 "논의가 필요하다"며 몇 달간 연락이 없다. 직접 찾아가면 행패 아니냐고 문과 마음을 걸어 잠근다. 


기자와 독자 서로 조금만 양보하면 훨씬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기자는 사실을 기반으로 철저히 취재하고, 오늘 아침 신문을 본 독자이면서 동시에 취재원인 이들은 있는대로 성실히 알려주면 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실이 나온다. 이 홍수에서 어떤 물길을 잡느냐는 기자의 역량이자 책임이다. 만약 다른 물길을 주목했다면 '이렇게 바라봤네?' 정도로, 물길을 보고도 제대로 확인도 안 한 채 쓸린 수풀만 지적했다면 기레기라 욕해도 좋다. 이 정도 합의만 갖춰도 훨씬 좋은 언론이 탄생하지 않을까.




서두의 심장을 찌르는 펜은 내가 받았던 메일 내용 중 가장 무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정말 오만하진 않았는지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 게 한 가지 이유.


더 중요한 건 사실에 바탕으로 충분히 분석했어야 할 내용을 썼지만, 

진영의 희망인 인기 많은 대중정치인. 

그를 지적했다는 것 만으로 (여기에 옮길 수 없을 만큼) 심한 가족 욕설이 내 가슴을 찔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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