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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교동방울이 Sep 30. 2021

주현영 기자를 보며

안 선배는 좋은 선배?

대학 4학년 시절.

조별 과제나 발표 수업이 손에 꼽을 정도였던 전공에서 고비를 맞았다. 20명 남짓 반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행정법 수업, EU법에 대한 토론 수업. 두 클래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얼굴은 두꺼운지라 발표 수업은 두렵지 않았다. 약간의 밝은 표정도 연습했던 것 같다. 대신 논리에서는 실수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틀린 말 하는 것 만큼 창피한 일이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모든 것을 설명하는 법이나 시선 같은 것도 신경썼다. 


결과적으로 연습은 소용없었다.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  


그는 질문력이 만랩이었다. 정확히는 질문 빈도가 만땅이었다. 한두 마디 이을라 치면 "저기 제가 궁금해서 그러는 데요"라며 손을 들었다. 내가 아쉬운 건 질문 자체가 아니라 내용이 없어서였다. 논리의 허점이나 애매한 포인트, 부족한 사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해야 한다. 질문의 기본이다. 당연히 궁금하니까 손 들었겠지...


그는 "학우님이 참고하신 문헌이 궁금하네요. 거기서 오류가 있었던 걸로 느껴집니다"라고 했고, 나는 "어떤 오류인지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니 "정확한 오류는 수업이 늘어지니 이 자리에서 논하기 적절치 않다. 원하시면 수업이 끝나고 설명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로서도 "얘는 지금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짤짤이로 성적을 받으려는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교재를 바탕으로 하는 게 필요조건이었고, 해당 교재는 행정법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책이었다. 무엇보다 교재 밖 신선한 논리가 아니라 책에서 원하는 뗌므를 떼 내 A사안에는 ##를 적용해 해결해야 한다.. 식의 논리 구조를 평가하는 수업이었다.


드디어 이 학생의 발표 시간. 짜증난 건 나뿐만 아니었나보다. 쉬는 시간 "오늘 그XX 발표날이지"라는 소리가 들렸던 걸 보니 다들 별렀던 것 같다.


가물가물하긴 한데 그의 첫마디는 이랬다.


"저는 제 논리와 의견을 중심으로 이야기 드리는 거라 가급적 질의에 신중을 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호한 질문은 수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인내가 끊어졌다. 큰소리가 나왔다.

"아니 신중이 아니라 궁금한 걸 물어볼거고, 시간 아까운 쓸데없는 질문 아닐 테니까 그냥 받으시라..."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예술.

"네. 인정합니다. 그 대신 형식과 절차를 꼭 지켜주세요. 내용이 충실한 질문이길 기대합니다."


황당한 게 나만은 아니었다. 단 하나의 질문도 없이 발표가 끝났고. 교수님은 오늘의 논쟁도 배울 점이라고 했다. 내용과 태도, 질문 내용을 모두 종합해서 평가하겠다는 말과 함께.


동행은 EU법에서도 계속됐다.

이태리인 교수가 영어로 된 교재를 한국말로 설명하는 신기한 클래스였다.


UN 상임이사국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일본이 들어가지 않는 건 국제적 논쟁거리라고 했다. 세계적인 반일 감정 때문이라는 분석도 덧붙였다. 나와 클래스메이트들은 그럼 비상임이사국인 것은 어떻게 설명하냐고 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의 입에서는 '의미 없는 논쟁은 본질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이 정도로 끝내길 정중히 요청드리는 바' 이런 말이 나왔다. 지금 생각해도 손발이 펴지지 않는다. 27살의 나는 프로페셔널을 빙자한 미숙함에 혀를 내둘렀다.



10년이 다 된 일이 생각난 건 SNL 인턴기자 주현영 덕분이다. 나보다 학번이 1~2개쯤 낮았던 그의 미숙함을 숨기지 못하는 미숙함이 떠올랐다.


주 기자가 실제 인턴이라고 치자.

그의 미숙함은 사회에 처음 목소리를 전하는 설레임. 잘하고 싶은 마음+좁은 취업문을 뚫었다는 자신감. 공채라면 PT면접이 남긴 유산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리라. 특히 번뜩인 건 박수 소리(를 잠깐 느낀 뒤) 다시 시작하는 디테일이다. 당연한 말을 대단한 말인 것처럼 포장하는 스킬도 현실적이었다. "답변드리기 어렵다"가 아니라 "답변하기 '조심' 스럽다"고 겸양의 탈을 쓰던 10년 전 그의 기억이 전두엽을 자극했다.


길지 않지만 짧지도 않은 사회생활에서 배운 게 있다. 회사나 조직에서는 '하고 싶은' 말보다는 '정확한' 말이 중요하다. 부족함을 숨기는 능숙함보다 실수를 인정하는 노련함이 빛을 발한다. 특히 당연한 일은 당연하게 넘어가야지 포장하면 자가당착에 빠진다.


"A라는 걸 밝혀냈는데요. 아무 데도 안 나온 거라 단독입니다."
"아무도 안 쓰는 건 단독이 아니라 기사감이 아니라서야. 다시 가져와."
"그래서 더 쓰고 싶은데요."
"고집부리지 마라. 마음은 알겠다만 차분히 생각해봐 맞는 소린지."


과거 내 모습이다. 저때는 맞는 줄 알았고, 고마운 데스크는 스탑을 걸어줬다.

내 포장에 넘어갔거나 우쭈쭈 했으면 이상한 기사만 써제꼈을 거다. 진성 기레기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인턴기자 꼭지를 기획한 사람은 최소 5년차 이상이지 않을까. 몇몇 후배나 면접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겠다. 앞에 말한 친구도 저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과한 희화화였다고 생각한다. 풍자의 기본은 희화일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주니어들에 느낀 불편함이 배인 듯 한 건 나만의 생각일까. 사실 주니어는 주니어 다운 게 매력 아니던가.


남자 기자가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엔 동의하지 않는다. 신천지 사무실에 쳐들어갔다 쫓겨나거나, 비밀서류를 찾으러 쓰레기통을 뒤졌는데 옆집 쓰레기였다 정도를 넘지 못할 것 같아서다. 


2탄에는 조금 실망했다. 8이라는 숫자가 팔팔한 느낌이 있어서 국민지원금 대상이 88%라는 소리를 하는 직원은 저 정도 채널에 들어갈 가능성이 0.88%가 안 된다. 정상적으로 취업문을 넘었다면 또라이 쿼터가 있던가 프로세스에 문제가 있었다는 방증이다.


무엇보다 3탄은 안 나왔어도 됐겠다. 재미가 없다. 단, 뷰가 보장된 콘텐츠, 이만한 호재(?)는 푹 우려야 하는 속사정 때문 아니었을까. 바람직하진 않아도 비즈니스적으로는 깔끔한 판단이다.


내가 불편했던 지점은안영미 앵커다. 사실 안은 좋은 선배의 행동은 아니다. 후배의 부족함을 커버하지 못했고, 스스로 의아함을 키워 뉴스 공신력을 낮췄다. 부족하다면 1편처럼 취재를 더 하라고 하거나, 후속을 전해주겠다고 해야 한다.


혹~시나 계속 이어간다면 안의 스토리를 조명했으면 좋겠다. '얼마나 잘하나 보자' 차원이다. 그래서 안의 주니어 시절이 더 궁금해지고, 지금의 위치에 오며 겪은 변화를 보여주면 제대로 된 풍자극이 완성될 것 같다.


문제는 또 있다.

주 기자랑 정이 들어 버렸다. 좋은 기자가 되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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