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업에 대한 아쉬움, 아니 무능?
열심히 버티고 다니는 동료들을 존경한다.
지금 할 이야기는, 열심히를 배제한 고인물의 위험성에 대한 스토리다.
흔히 조직문화라 이야기한다.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이 과정에서 1+1=3을 만들기 위해 조직이 꾸려진다. A는 냉정한 사람, B는 감성적인 사람, C는 무던한 사람, D는 까다로운...처럼 사회 축소판이 만들어진다. 퍼포먼스로 틀면 '양'으로 승부를 보려는 사람, '질'로 한 방을 노리는 사람 등이 있겠다.
회사생활이 힘든 건 이 개성들을 제어하는 지난함 때문이다. 냉정한 아이디어를 감정적으로 실행하려 들면 충돌이 생긴다. 뭐든 좋다는 무던함에 까다로운 이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중요한 게 구성원의 업무 톤을 맞추는 과정이다. 회사에는 조직을 다듬는 중간관리자나 리더라는 사람이 있다.
단, 이들이 톤을 잘 맞추려면 선결 조건이 있다.
회사에 대한 구성원들의 로열티가 우선이다.
아, '내 회사처럼 불사른다'나 억지로 '주인의식을 갖자'는 뜻은 아니다. 월급쟁이 아닌가. 대신 받는 급여 정도는 무조건 해내겠다는 책임감은 필요하다. 최선을 다했다면 퍼포먼스는 올라온다. 태도에서 성과가 나온다고 믿는다.
성과가 나오면 회사를 내가 지켜야 할 재산(동시에 나의 재산)으로 느끼게 된다.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인가"에 당당히 YES를 외칠 수 없으면 월급루팡이라는 사실은 솔직히 인정했으면 좋겠다.
평화롭던 어느 날. 동료가 말했다.
"무리하지 마요. 바득바득 마감 안 해도 돼요. 그럼 저도 써야 되는데."
각자의 용량이란 게 있는 걸 잘 안다. 배려 담긴 말이라고도 생각했다. 걱정 말고 내가 다 커버한다고 했다. 그래야 했다. 전할 소식은 전해야 하고, 무엇보다 적은 기사 볼륨과 비례해 독자가 줄고 있었다. 회사가 위태위태한 건 신문의 위기 탓으로 생각했는데 들어가 보니 내부에서 납품? 되는 기사 퀄리티가 굉장히 떨어졌다.
"혼자 더 쓴다는 것도 좀 그래요. 왜 스스로 힘들라 해요. 솔직히 제가 무능한 사람처럼 비칠 거 같아요. 월급을 많이 주는 데도 아니고. 우리가 열심히 해도 몰라요."
두 번째 말에 갸우뚱했다. 그럼 일을 안 하면 연봉을 깎나. 그런 회사는 아니었다. 무능으로 비치는 게 아니라 명확히 무능+태업이었다. 차라리 부족하니 도와달라. 아님 필요한 건 서포트하겠다고 말해줬으면 좋았겠다. 열심히 해도 모를까? 회사가 정말 개개인의 퍼포먼스를 관찰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난 정말 힘들지 않은 업무량이었다.
어차피 연봉 인상률은 드라마틱하지 않으니 현상 유지를 원할 수도 있다. 이해한다. '워라밸'이나 '회사는 날 구해주지 않는다'는 명제를 제치더라도 각자의 스타일을 존중한다. 휴식은 소중하고, 회사는 냉정한 곳이다. 다만, 따뜻한 곳으로 만들 노력을 했는지도 돌아보자는 거다.
고민이 시작됐다. 나보다 더 하는 동료가 있으면 비교당한다는 생각-> 한 사람이 도드라지면 내 급여 인상은 소원해진다는 생각이 깔렸다고 해석했다. 반대로 나는 파이를 키우자는 거였고, 그대는 현상 유지를 해도 좋으니 내가 메꿔보겠다는 뜻이었는데 생각의 톤이 달랐다. 슬펐다.
인간적으로 관계는 좋아 가끔 퇴근길을 함께했던 동료기에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항상 상향 이직을 원했다.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 하는 걸로는 가고 싶은 매체는 쉽지 않을 겁니다. 가더라도 업무 강도가 최소 2배입니다. 물론 월급은 2배가 안 될 거예요. 당장 점프할 게 아니라면 우선 매체를 키워봅시다."
"네 고마워요. 저도 초심으로 돌아가 볼게요."
초심의 첫 발인 다음날 보고 시간. 이미 조간에 깔린 소식을 그대로 베낀 발제가 올라왔다. 기사는 매체의 얼굴인데, 월급을 논하던 이가 못생긴 얼굴을 자랑스럽게 내밀면 어떡해야 하나.
답을 내려 노력해봤다. 케미스트리를 위해 티 나지 않게 일을 했어야 했나? 혼자 너무 나섰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루 어떤 기사가 나갔는지 모니터링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미 3~4일이 지난 이슈를 새로운 소식이라며 발제해도 게이트키핑이 전혀 되지 않았다.
기사에 사람 이름이 틀린 사례가 나왔고, 고치자고 하니 애 먼 부분이 고쳐졌다. 고쳐야 한다는 말은 잘난 척 섞인 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가만있자. 그래도 우리 존재 목적은 좋은 기사 쓰기 아니었나.
회사도 문제를 알고 있었다. 여기서 리소스의 논리가 작용했다. 오랜 시간 고인 사람들을 바꾸기에는 한국의 시스템은 근로자의 편이었고(이건 추후에 자세히), 새로운 피가 좌충우돌해주길 바랬다. 나가야 할 사람들이 안 나가고 자리만 지킨다는 말과 함께.
나도 내 태스크가 힘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결국 난 실패했다. 내 포지션도 관리자가 아니었다. 커피나 술, 산책까지 동원해가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돌아오는 스몰톡은 개인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나 어디가 돈을 더 준다더라 정도였다.
또 혼자 남은 사무실. 공회전했던 몇달을 돌아보니 진심으로 존경할 사람은 없었다. 가슴 속 허전함이 컸다.
흠집 내고 싶지 않은 이력서지만, 한 줄을 뒤로 밀기로 했다. 사표를 냈고 혹여 자리잡지 못하면 돌아오라는 말을 들었다.
고마웠다. 하지만 나태함이 깔린 조직의 미래는 어두웠고 그때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모두 업계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