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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Dec 30. 2018

피아노 일기 2) 시간이 무서워요







무척이나 힘들었던 2015-6년을 보내고 깨달은 것이 있다면 결국 시간은 흐른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위안이던 시기가 지나고 나서도 항상 시간에 기대어, 의지하며 살았다.

모든 것은 지나갈테니까,
슬픔도 분노도 시간이 옅어지게 해줄테니까.

-

피아노를 배우기로 마음먹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안방에 방치된 피아노를 거실로 꺼내오는 거였다.
그리고, 이 피아노가 뭔가 이상함을 나의 막귀와 막손으로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건반은 무겁고 삐걱거리고, 이상하게 잡음이 섞였다.

조율이 필요했다.
인터넷으로 두 군데 업체를 알아보고 가격을 문의하니, 10만원-15만원 정도라는 답을 얻었다.

하지만 집에 와서 피아노 상태를 본 조율사는 그 네 배 정도 되는 가격을 불렀다.

“마지막 조율은 언제 하셨죠? 피아노는 예민한 악기라 온도와 습도를 신경 써줘야하고 위치를 바꿀 때도 조심해야 해요. 그래도 얘처럼 90년대에 만들어진 피아노들은 중국산이 아니라 추운 나라의 좋은 나무로 만들어져서 지금 나온 피아노들보다 더 좋아요. 조율이 끝나고나면 아마 훌륭해질 거에요.
지금은 너무 오래 조율을 안해서 음들이 다 떨어져 있어요. 건반도 뒤틀려있고. 음을 한 번에 다 올리기는 무리가 있어서 두 번에 거쳐 작업을 해야하고 그걸 다 하면 55만원 정도 되겠네요. 작업 시작할까요?”

눈 앞이 아득해졌다.
55만원이라니.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그냥 방치해 둔 결과는 이렇게도 무섭게 돌아올 수 있는구나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시간이 나를 배신한 느낌이었다.

어느정도 협의 끝에 35만원의 금액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속살을 드러낸 피아노에는 뽀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조율사 선생님은 건반을 하나하나 꺼내 먼지를 닦고, 조이는 일을 반복하셨다.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방치의 결과는 이다지도 혹독했다.

집 안 전체에 까만 먼지가 폴폴 날아다녔다.
선생님의 앞치마와 두 손도 이미 까맣게 물들어있었다.

-

시간과 나의 관계는 이 조율을 통해 뒷통수를 맞고 재조정되었다.
내가 돌보지 않은 것들은 시간 속에서 이렇게 망가져버리는구나. 시간이 이렇게 엉망으로 망가뜨리기도 하는구나. 새삼 무서웠다.
그렇게 소중하다, 지금은 그저 시간 속에만 두고 있는 관계들이 떠올라서. 그 관계들이 나의 피아노처럼 뒤틀리고, 먼지가 쌓여가고 있을 생각을 하니 형언할 수 없게 슬퍼졌다.


-

큰 돈과 총 7시간이 넘는 작업 시간을 들인 피아노는 지금 아주 또랑또랑하고 맑은 소리를 낸다. 연주가 더 즐거워졌다.

피아노는 돈과 시간으로 되돌릴 수 있었지만,
어떤 것들은 돈과 시간으로도 되돌릴 수 없겠지.

이 취미는 시작부터 내게 시간의 무서움을 깨닫게 했다. 앞으로는 무엇을 더 가르쳐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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