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할 때 웃통을 벗는 남자분이 계신다.
수련하다 그 몸에 시선이 닿으면 아주 화들짝하고, 즉각적인 불쾌감을 느꼈다.
뜨거운 냄비를 손으로 만진 것처럼.
낯선 사람의 상반신 나체를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은 그 몸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불쾌와 당혹이다.
전사 자세로 고개를 돌렸을 때, 다운독 자세에서 뒤를 보게 됐을 때 무방비한 상태로 그 몸과 만났다.
수련을 하던 중에 기분이 상하고, 수련을 마친 후에도 애인과 통화할 때 토로하며 이 짜증을 곱씹었다.
선생님께 말씀드려볼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그럴수록 불쾌감은 더 커졌다.
수련을 시작할 때 옷을 입고 가지런히 앉아 있는 모습만 봐도 싫었다.
그러다, 웃통 벗어제끼는 저 사람을 내가 바꿀 수는 없어도
나의 시선이나 불쾌한 마음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신경을 아예 차단하는 연습을 해보자
그게 나의 수련이다-란 마음으로 수련에 임했다.
그 방법은 적당히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정말 효과가 있었던 건 얼마 전의 깨달음이다.
그분이 옷을 벗고 말고는 애초에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
얼핏보면 위와 다르지 않아 보이나, 아주 다르다.
내겐 큰 울림이 있었다.
바꿀 수 있음/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바꾸고 싶어하는 마음 자체가 잘못되었던거다.
내가 누군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고 싶은 것처럼
누구나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머리에 롤을 말고 지하철을 타고 되고,
한겨울에 핫팬츠를 입어도 되고,
식빵에 김을 싸먹어도 되고.
그러니, 수련중에 답답하면 옷을 벗어도 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이 깨달음은 내게도 자유와 편안함을 줬다.
혜민스님과 현각스님의 해프닝 속에서 아래의 말은 오래 남았다.
"영적인 삶은 비행과 같다. 끊임없이 항로를 수정하고 조정해야 하며, 난기류를 만나기도 한다.
나 또한 비행 계획에서 여러 번 벗어났고 때로는 인간답게 계속 그럴 수도 있다"
깨닫고, 반성하고, 실수하고, 다시 깨닫고를 반복하며,
계속 이렇게 방향을 수정하며,
어제보다 오늘 좀더 유연하고, 편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을 땐 올바른 자리에 서서,
내가 지나온 굽은길들을 그저 여유로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