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정신에게

제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조금 불편하셨으면 좋겠습니다.

by 강선미
1*4nGCrOYzzif-fxYxaK0AZQ.jpeg


‘살아있는 정신에게’(서울대학교 김윤식 교수, 1994 대학신문 기고글)라는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날 지탱해왔던 건 껍데기뿐인 육체가 아닌 순간순간의 ‘살아있는 정신’ 덕분이었다는 깨달음. 내가 현재 어디 서 있는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성. 이 글이 저로 하여금 살아있는 정신의 가치에 대해 일깨워 주었듯, 오늘 제 글을 통해 어쩌면 무너지고 있을지도 모를 여러분들 스스로에 대해 오래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들이 절대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단어 세 개를 나열해보겠습니다. 우울 / 돼지 / 자유. 평상시에도 자연스럽게 쓰는 이 단어들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냥 이런 뉘앙스일 것이다라며 문지르고만 넘어갔던 이 단어들에 집중해 제 칼럼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살아있는 정신에게‘는 서울대학교 김윤식 교수님이 1994년도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예상 독자는 그 해의 서울대학교 신입생입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군의 입학이 유독 축복받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조금 생각해보기로 하자.
군의 입학이란 한갓 우연성의 일종이라 볼 수 없겠는가


교수님은 국내 최고 대학 신입생들에게, 여기선 ‘군'으로 표현된 당신의 입학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며, 당신이 머리가 좋아서 혹은 남들보다 뛰어나서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살면서 모든 것이 당신에게 맞추어져 있었기에 당신이 편안하게 대학을 들어올 수 있지 않았냐고, 무슨 대학이건, 무슨 학과 건 정말 원해서 들어왔냐고 묻습니다. 말문 막혀버린 이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갈 데 없는 돼지였다’고.


여기 첫 번째, ‘돼지’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돼지라는 단어는, 특히 심한 말로 개돼지라는 단어가 사람에게 쓰일 때 우리는 굉장한 반감을 갖습니다. 돼지처럼, 가축처럼 당하기만 하면서 살고, 그것을 자각했을 때도 그때만 한 순간이라는 의미에서 등장한 이 단어는, 우리와 사실 꽤 가깝습니다. 살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큰 산들을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수용합니다. 사실 아직도 저는 왜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정의 내리지 못했습니다. 제겐 고3이라는 타이틀과 입시라는 의무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세뇌당한 진리에 스스로를 욱여넣는 우리는 너무 당연한 노예입니다. 당연한 게 왜 당연한지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가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군이 돼지 또는 노예였음이란 물론 군의 잘못이 아니리라.
군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닌 까닭이다.
군은 다만 태어나졌을 따름.


물론 우리가 노예임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우리가 던져진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우린 태어나면서부터 던져졌을 뿐이라고. 혼자 있음, 불안, 무서움이라는 감정은 우리가 던져졌기에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다고. 근데 왜 이 감정들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가? 이에 대해 교수님은 말합니다. 이 자연스러운 감정들은 부모님의 사랑이라는 위선에 포장되어 감춰진다고.


그러나 어느 순간 군은 마침내 운명의 순간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계기에 직면하게 된다.


저는 여기서 운명의 순간을 우울이라고 봤습니다. 여기 우리의 두 번째 단어가 나옵니다. ‘우울’. 우울이라는 감정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우울할 때 왜 우울한지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보통 우울하면 그 감정에서 빨리 벗어나려고만 하지만, 경험상 왜 우울한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으면 그 감정은 반드시 다시 찾아옵니다. 우울함은 사실 내 안의 존재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고민은 살면서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역사적 사회적 조건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나' 자신의 세상에서의 있음의 의미란 무엇인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어떤 방향성도 해답도 없음을 서서히 군은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지금 여기 '나'가 있다는 것. 이것만은 절대로 의심할 수 없다. 여기 '나'가 있되 혼자 있다는 것. 불안하다는 것. 무섭다는 것. 이 엄청난 짐을 지고 있다는 것.


실제로 하이데거는 이 문제의 대답이 실존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고. 사실 혼자 있다는 걸 인정하면 그것이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을 겁니다.


이 짐은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 차라리 의무라 불려야 마땅하리라.
의무는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의무니까.
이 의무를 수행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있다. 권리가 그것.
혼자 있음으로 말미암아 감당해야 될 불안과 공포를 대가로 하여
비로소 얻어진 권리, 이를 두고 자유라 부를 것이다.
자유이되, 무한한 자유가 아닐 수 없는데 그것은 던져진 존재로서의 그 의무의 정비례하는 것, 이를 결단 혹은 계획이라 부를 것이다.
'나'는 무엇이며,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그 아무도 궁극적으로는 관여할 수 없기에 그 계획은 저주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의무 그것만큼 권리의 처절함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지 않겠는가.
돼지에서 벗어나 이 저주스러운 자유인으로 변신하는 장대한 장면의 입구, 살아있는 정신이라 부르는 이 자유 앞에 군은 지금 서 있다.
군의 입학이 축복받아야 할 이유가 혹시 있다면 바로 이 장면에서 이리라.


이렇게 글은 끝납니다. 우리는 지금 돼지에서 자유인이 되기 위한 특별한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존재에 대한 사유의 부재는 자유를 무기로 만들며 우리를 상처 입힙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입시에 성공하려면, 네가 특별한 존재임을 잊어야 한다고. 한없이 맞는 말이지만 의문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꼭 대입이 아니더라도, 과학한국의 미래를 선도하겠다는 다짐을 가지고 입학한 우리 모두가 선택된 존재임을 잊어야 할 만큼,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걸 잊어야 할 만큼 입시라는 것이 대단한 것인지, 내가 입시가 끝나고 나서도 특별한 존재임을 다시 기억해낼 수 있을지. 스스로에 대한 사유는 시작도 전에 차단당하고 나서 대학에 가서 주어지는 자유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습니다. 나의 아픔에 한없이 강해져야 했기에, 나중엔 우울이라는 감정이 와서도 우울한 지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매일 걷는 길이 상념으로 통하는 길이 되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의지의 부재가 아닌 존재의 부재를 더 두려워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진짜 하고 싶었던 질문은, 혹시 내신이란 틀의 노예가 되어 주어진 공부에만 충실하고 본연의 나란 존재로부터 오는 여러 진실되고 뼈 아픈 의문과 부정을 하루에 대한 권태로 치부하지는 않았는지, 당신은 과연 살아있는 정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입니다. 외부세계는 내면세계를 통과하여 받아들여집니다. 우리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진실하고 탄탄한 내면세계를, 살아있는 정신으로 걸어갈 앞날을 응원합니다.


경기북과학고 12기, 2018.08.27 송련소식 31호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