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랭보> (22.10.19 20시)

(윤소호, 정상윤, 조훈) *프리뷰 공연 후기

by 강선미

영원한 방랑의 시작, 뮤지컬 <랭보> 프리뷰 후기


이 뮤지컬을 보기로 결심한 계기는 단순했다. 내가 좋아하는 윤소호 배우님이 선택하신 작품이고, 원래도 시와 예술을 동경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상징주의 대표 시인인 '아르튀르 랭보'의 생애를 담은 뮤지컬이라는 소개글만으로도 보고 싶은 마음은 충분했다. 더 바빠지기 전에 하루빨리 보고 와야겠다고 생각했고 이왕 볼 거면 윤소호 배우님 첫공을 보고 오자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갔기에 티켓 구매를 위한 고민이 필요 없었다. (선후가 바뀐 것 같긴 하지만) 예매 후 시놉시스를 읽어봤는데 잘 감이 오질 않아서 후기를 찾아봤고, 여전히 어떤 뮤지컬인지는 잘 모르겠단 생각을 했지만 오열극이겠거니 짐작만 했다. 안 그래도 뮤지컬을 보면서 펑펑 울고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시기여서 예매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서론은 이쯤 하고, 티오엠 1관, P열 중블 자리에서 공연을 봤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줄이었는데 맨눈으로 봐도 배우 얼굴이 보일 정도로 시야가 괜찮았다.(다른 말로 하면 극장이 굉장히 작다는 말이다.) 인터미션 없이 120분이라는 시간으로 진행되는 러닝타임이 살짝 걱정되었으나 다행히 소극장이라는 특성상 배우와의 거리가 가깝고 현장감이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가령 시인의 얘기를 다루다보니 소품으로 종이를 사용하는 씬이 꽤 있는데-종이를 구긴다거나 날린다거나 줍는다거나...-종이가 팔랑팔랑 날리는 소리까지 스피커로 증폭되는 현장감에 깜짝 놀랐다) 중간에 몰입이 한 번도 깨지지 않았고 끝까지 잘 관람할 수 있었다. 악기 소리는 따로 녹음된 걸 쓰는 것 같았고 배우 목소리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튀지 않게 볼륨 조절이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어디선가 라이브 연주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딱히 라이브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무대는 특수효과나 장치 없이 공간 분할만 해놓은 초기 상태가 마지막까지 이어진다.배경은 흰색 스크린이었는데 조명으로 상을 맺는 형식을 사용한 듯했다. 그러다 보니 또렷하다기보다는 흐린 해상도로 배경이 전환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눈에 밟혀서 못내 아쉬웠다.


오늘도 여전히 윤소호 배우님의 감정 표현은 완벽했다.(물론 노래도!) 배우들 간의 케미도 좋아 보였던 게 편안한 관계에서 치는 듯한 자연스러운 애드립성 대사와 행동 덕분에 관객 전부가 피식 웃을 수 있는 장면이 많았다. 특이한 게 세분 전부 미성이 아름다우신 분들이셔서 노래들을 듣는 동안 귀가 참 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상윤 배우님은 이번 작품으로 처음 뵙는데, 대사를 읊으실 때는 꽤나 저음의 목소리를 가지신 분이 노래하실 때는 미성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셔서 음역대 폭도 넓고 노래도 잘하시는 배우님이라 생각했고 새로운 배우를 알게 되어 기뻤다. 감정 표현도 정말 풍부하셔서 실제로 눈물 흘리시는 게 조명에 반짝하고 비추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울 걸 각오하고 갔지만 생각 이상으로 많이 울었다. 그냥 랭보라는 사람이 너무너무 안쓰러워서 눈물이 났다. 나는 윤소호 배우님이 표현하신 랭보밖에 보지 않았고, 그전에도 랭보는 이름만 들어봤기 때문에 생애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하지만 작중에서 표현된 그대로의 삶이 실제 랭보의 삶이었다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외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집중해서 보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많은 생각이 떠올랐던 뮤지컬이었다.


나는 시인은 시인으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사람은 각자 타고난 재능이 다르고 결국 재능대로 산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안다. 타인의 재능을 흠모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단 것도, 결국 모두가 각자의 십자가를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도 안다. 흉내 내는 사람은 결국 티가 나기 마련이고 진짜를 따라갈 수 없단 사실도 안다.


작중 랭보는 태어나기를 천재 시인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무늬만 예술가로 포장해 사칭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았던 시대 속에서 랭보의 시를 제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은 베를렌느밖에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베를렌느는 사는 도중 명예를 얻고 시에 대한 인정도 얻지만 랭보는 사는 동안 명예도 인정도 받지 못한다.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베를렌느는 세상 모두가 인정하는 본인의 재능을 의심하고, 자기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박해서 늘 우울하고 불행하다.


불행은 주변에 있는 사람도 불행하게 만든다. 불행은 결국 모든 걸 집어삼킨다. 결국 베를렌느의 불행이 랭보를 집어삼킨다.


세상 천지에 본인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곤 베를렌느 하나였는데 베를렌느에게 온갖 상처가 되는 박한 평가(진심은 아니었으나)를 듣고 랭보는 베를렌느와 작별한다.


극을 보면서 어떻게 랭보는 저런 성격을 가지게 된 걸까-하고 생각해 봤다.


지나치게 밝고 도전적이고 진취적으로 보이는 그의 성격이, 결국 그의 방어기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조심스럽지만 아버지에 대한 결핍이 베를렌느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으리라는 추측이 드는 만큼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그에게 언제나 현재 진행형의 상처였으리라 짐작해본다)


모든 걸 다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데 주저함이 없는 그는 잃을 게 없는 지옥을 살고 있기 때문에 어디든 나은 곳으로 도망치고자 발버둥 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오로지 시를 쓰는 것만이 중요하고 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던 그가 절필을 하고, 돈이 되는 일은 뭐든지 하겠다고 한 것은 그의 영혼이 죽음으로 걸어가기를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시는, 낭만적인 거짓말일 뿐이야.
거짓말로는 그 어떤 것도 바꿀 수가 없어.


시를 쓸 때만큼은 누구보다 솔직하고 진실되었던 그가 거짓말이라고까지 말해가면서 부정하고 싶었던 건 시보다는 그의 삶이었을 테니.


그 선택으로 하여금 그는 삶의 의지를 완전히 놓아버렸고 스스로를 지옥으로, 더 큰 지옥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겠다는 의지는 죽음이 삶보다 행복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야 가능하리라.


왜 그는 불행을 신으로 삼게 되었을까

왜 그는 불행이 마땅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을까

왜 그는 스스로를 불행해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결국 그는 투시자가 되었을까?


보통 사람은 볼 수 없는 세상 저 너머 미지를 추구하고, 거룩한 병자와 저주받은 방랑자의 삶을 살며, 저 깊은 심연의 끝까지 험난한 고행의 길을 걸어간 그는 시를 쓰는 대신 그 자체가 시가 된 시간들을 보냈다.


그는 지옥 같은 삶을 노래한 시를 주로 썼다.


나는 재앙을 불러들였고, 그리하여 모래와 피로 숨이 막혔다.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 아르튀르 랭보


우울하지 않은 사람이 우울의 말을 쓸 수 없는 것처럼

지옥을 아는 자만이 지옥을 노래할 수 있다.


버티는 삶을 살았던 그는 기록으로 도피하여 안식하던 것을 멈추고 그 모든 지옥을 온전히 견디면서 어떤 문장을 떠올렸을까?


시인의 글은 결국 읽히기 위해 쓰인 글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와닿았다. 아마 그가 절필을 하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그가 쓴 글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세상에서 다시 한번 더 버림받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죽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


예전에는 랭보의 시가 어렵게만 쓰였다고 생각했는데

뮤지컬을 본 이후에 다시 읽으니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조금은 더 와닿는 것 같다.


외로웠던 그의 삶을 내가 감히 이해한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오늘 그에게 아픈 사람만이 아픈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는 위로 같은 걸 받았다고 생각한다.


티켓 봉투에는 랭보의 독백 중 일부인,

인생은 불행이다. 쉴 틈 없는 불행의 연속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곳에 존재하는 것일까.

가 적혀있다.


앞으로는 내가 왜 이곳에 존재하는 건지 모를 날들,

일상이 유독 버겁게만 느껴지는 어떤 날들을 보낼 때면,


예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날 좀 살려달라고 하기 전에


더 오래 취해 있어
더 깊이 꿈꿔
더 많이 미쳐
그것들이 현실을 이길 수 있게


가 문득 생각나겠거니 하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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