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더 오래산다

2023.02

by 강선미

테마파크 어트랙션 캐스트로 일하면서의 단상 모음



0.


어떤 무게의 불행을 맞닥뜨려도 가벼운 웃음이면 흘려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온전히 서로의 편이라는 걸 알기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되고 행복했던,

나의 소중한 에버랜드 동기들에게-


많이 고마웠고, 자주 보고 싶고,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1.


원하는 것들을 원하는 때에 갖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성인이 되고 씀씀이는 커져가는데 마냥 용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기엔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여러 벌이 활동들을 했다. 누적해온 시간들에 부끄럽게도 개중 재밌었다거나 보람차거나 했던 기억이 없다. 돈이 목적이었기에 주로는 학원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했고, 쏠쏠한 시급은 '일은 그저 일이지' 하는 생각을 고착화시키기 충분했다. 노동의 가치가 결국 페이를 결정하는 거라고 말씀해 주셨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 정신에 바람을 불어넣자며 시급 너머의 가치를 꿰뚫어보기엔 어리고 얕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시절의 나에게 일은 일이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즐겁지 않은 시간들을 버텼다.




2.


그런데 미련이 있었다. 새내기 때부터 '언젠가 놀이공원에서 일해보고 싶어'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었는데, 언젠가는 기약 없었기에 자주 밀려났고 비록 말뿐이었던 다짐이었대도 문득 떠오르는 날이면 서글퍼졌다. 돈을 벌자고 놀이공원에서 일하기엔 시간당 보수가 걸렸고 스펙을 목적으로 하자니 차라리 대외활동을 하고 말지-하는 생각이었달까. 물론 그즈음엔 모든 걸 스펙 위주의 활동으로 가득 채워 테트리스하듯 시간을 짜 맞추며 살던 때라 의지가 있었대도 시간은 없었겠지만, 그렇게 한 해, 두 해 살다 보니 용기가 흐려지는 중임이 체감됐다. 하고 싶은 게 하고 싶던 것으로 끝나는 경험이 누적될수록 새롭거나 처음 하는 일들이 줄어갔다. 새로운 자극이 없으면 매일이 똑같은 일상을 기억하는데 구태여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게 된다. 바빴던 시절의 기억이 흐릿한 건 열심히는 살았으나 생에 그닥 흥미는 없었기 때문이겠지.




3.


미련이나 후회를 습관처럼 삼켜서 지독하게 앓아본 사람이 깨달은 바가 있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안 하면 시도가 점점 비싸진다는 거다. (후회든, 기회비용의 스노볼이든,) 시간엔 어떤 식으로든 이자가 붙더라는 것도 연장선상에서 내가 나름대로 해석해서 인정하게 된 세상의 이치이기도 하고.




소심한 나는 전공을 놓고 하고 싶은 걸 찾아 나서는 사람은 아니기에 해야 할 걸 끝내고 하고 싶은 걸 해도 되는 때가 오길 기다렸다. 최합 이후엔 당장의 스트레스에 복잡한 머리가 차분해지길 기다렸고, 그렇게 가득 차 있던 불안이 방 뺀 곳을 낭만으로 채우고 싶단 생각을 했다. 커서 뭐가 되려나-하며 걱정하다 하루아침에 큰 잘못만 안 하면 노년까지 유지할 수 있는 직장명이 생겼다. 뭔지도 모르면서 사회적 '뭐'가 될 순 있더라고. 입사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 몰랐지만 자연스레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고 쉴 때 동안 나름 충전한 에너지를 가지고 '현실과 낭만에 둘 다 발 담그면 안 되는 걸까' 하는 객기로 도전한 게 에버랜드 알바였다.




4.


겸연쩍은 얘기지만 에버랜드가 한 번에 나를 붙여준 건 아니다. 서류 반려만 두 번을 당하고 세 번째 지원에서야 면접에 응할 수 있는 기회를 줬는데, 지원한 캐스트 종류/알바 경력/성격/가능한 근무 기간 등에서 필터링 기준이 있는 듯했다. 글로 자기소개를 풀어쓰는 칸이 없어서 객관적인 알바 경력들만 채운 서류들에 패논패식 검증이 진행되는데, 이후 단계인 면접에서 지원자가 가지고 있는 텐션과 대답을 보고 부서 배치가 된다고 하는 카더라가 있다. 평생 중요할 때면 항상 운이 좋았던 나는 알바 지원자들의 부동의 1지망인 어트랙션 캐스트로 배정받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오는 매직랜드에서 일할 수 있었다. 일해본 바 매직랜드 어트랙션 캐스트는, 환상의 나라 에버랜드의 '환상'을 지켜주는 캐스트라고 감히 말해본다.




5.


국내 최고 테마파크답게 바로 현장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 아닌, 3일간 캐스트로서의 마음가짐(서비스정신)과 필수적 숙지사항(안전 매뉴얼) 등을 교육받는 시간이 있다. 살면서 다양한 필수 이수 교육들을 받아왔기에 약간은 건방지지만 이번 교육 또한 구색 맞추기 용도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본격적이고 철저하게 교육생들을 탈바꿈시켜주는 시간이었다는 점에서 놀랐다. 잊고 싶지 않아서 필기까지 해왔다고 하면, 교육내용이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전달되려나.




6.


교육 도중 여러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지만 내 머릿속 알을 깨부숴준 말이 있어 부분적으로나마 언급해 본다. 안전교육 담당 프로님께서 Job&Core를 이해시키기 위해 다들 왜 집과의 거리도 먼 '에버랜드'를 굳이 선택해서 오게 되었는지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잡앤코어의 핵심은 누군가에게 '명사'로 어떤 직업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할 수 있는 상태를 넘어서 '동사'로 어떤 일을, 어떻게, 왜 하고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내 감정을 정확히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라, 막연하게 '해보고 싶어서'가 지원 동기의 전부라 생각했는데, 프로님께서 '지금 이 나이대만(20대) 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비일상 속 한 부분에 속하여 순간을 특별하게 추억으로 탈바꿈시켜주는 일을 일상적으로 하는 경험은 이곳에서밖에 못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일 거라 정리해 주셨다. 워딩이 살짝 과격하지만, '너희 여기 최저시급 받자고 온 거 아니잖아?'라고 해주셨는데 그 순간 내가 내뱉은 탄식 속엔 아마 나의 낡은 나의 가치관과 결합되어 있던 자아가 얼마간 함께 떨어져 섞여 나왔을 것이다.




7.


그래서, 에버랜드에서의 모든 순간이 마냥 행복했어?라고 묻는다면 당연하게도 그건 아니었다고 하겠지만,


돌이켜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는 행복한 시절은 맞았다고 말하련다.


내가 일하기 전 가졌던 환상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하고, 바뀌게 해준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고도!




8.


비수기 2월을 기준으로, 에버랜드의 일 평균 방문객은 비 오면 만 명 언저리에서 맑은 날 주말 기준 3만 명 정도까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매직랜드에서 내가 만나게 되는 손님들은 주로 귀염 뽀짝 어린이 손님과 그 보호자분들(커플이나 노년층, 외국인 손님은 매직랜드의 주요 고객은 아니기에)로 한정되어 있었다.


자동차 왕국, 시크릿 쥬쥬 비행기, 비룡열차, 우주전투기, 그리고 썬더폴스까지 다양한 놀이 기구에서 일하며 얻을 수 있었던 최고의 복지는 어린이들의 티없는 웃음이었다고 고백한다. 행복하고 싶어서 테마파크에 방문한 어린이 손님들의 표정에서 숨김없이 삐져나오는 기분 좋은 설렘을 온몸으로 느꼈다.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보다 한 옥타브씩은 높은 음의 격양된 하이톤을 내며 대화를 주고받는 활기찬 모습이 좋았다. 아이들을 대하는 서로 다른 가정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란 어떤 형태일지 그려보기도 했고, 나의 핸드 롤링과 하이파이브, 칭찬이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영양제 한 방울 정도의 영향이라도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내가 전해줄 수 있는 사랑의 크기를 키우는 법을 연습했다.




9.


가끔 까다로운 요구를 받는다거나 유독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버거운 날의 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개인 시간을 보낼 때의 나와 보이는 나 사이에서 나던 불협화음은 이제 조화롭다. 파크 오픈을 위해 일찍 출근해서 준비하는, 그나마 한적한 시간에도 수많은 프로님들과 캐스트 동료들이 함께하고 있고, 잠에 들기 전까지 평범과는 거리가 먼 숫자의 낯선 사람들 속에서 지낸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사람 때문에 지치는 날이 물론 많았지만 마음속 먹구름들은 비가 되기도 전에 내 사람들이 전부 나누어 가져가 주었다.




10.


일하는 내내 매일같이 동기들의 애정을 받았다. 그 사랑 덕에 나는 행복이 가까이 있음을 알았다. 더 자주, 쉽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생일날 출근한 덕분에 살면서 축하 노래를 가장 많이 들은 날을 경신하기도 했고, 더없이 과분한 사랑을 만끽하며 감사를 갚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도 누군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사랑으로 품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을 한다. 타인의 목소리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시끄럽지 않고 노래처럼 들리는 경험을 했다. 그 노래 속에서 나는 평화로웠다. 이 대목에서 동기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그대들의 싱싱한 초록 속에 내가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다시, 0.


하고 싶은 말도, 정리되지 못한 날것의 생각들도 너무 많아서 결국 퇴사하고도 한참 후에 기록하게 되는 문장들이다. 여전히 어제 일처럼 생경하게 내게 새겨져있는 기억이라 한 문장 한 문장 곱씹느라 시간이 걸렸다는 말로 변명을 해본다. 청춘다움에 대해 생각할 때면 지나간 계절을 추억한다. 미련이 많은 내가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행복의 표본이 에버랜드에서의 기억들이다. 현재 나의 행복은 감당이 안 될까 외면했던 나의 버킷리스트에 나 스스로가 귀 기울여 들어보자고 했던 선택에 빚지고 있다.


낯선 방문객의 비일상에 행복을 심어주는

캐스트들의 오늘 하루도 무사히 행복하길 바라며.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

/ 오은, 계절감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기억들을 팡팡 털어도 베개는 풍성해지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