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중 가장 큰 명절이 설과 추석인건 장보고기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추석은 안지내봤지만, 아무튼 설은 아주 큰 이벤트다. 참고로 2020년의 설날은 1월 25일 토요일.
설 며칠 전부터 설맞이 당구 토너먼트 대회가 열렸다. 난생 처음 배운 당구에 재미가 들려 하루에 두시간씩 연습했다. 초구 잘치는 법부터 쓰리쿠션까지... 초보는 30만 되면 이겼기에 두판인가를 이기고는 우승까지 넘봤지만, 같은 초보인데 신동이라 쓰리쿠션을 밥먹듯이 하시는 30인 분을 만나 안타깝게 졌다. 덕분에 심심하지 않았던 한주.
설 전날엔 이탈리아 기지에서 우리 기지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바람이 심해서 취소됐다. 몇시간 동안 다양한 요리를 준비했는데.. 그래도 뭐 형님들이 드시고 내가 먹었으니 됐다. 전날 아침부터 모여서 차례상에 올릴 두부를 만들었는데 다 실패해서 콩가루를 뭉쳐놓은 흰색 덩어리가 탄생했다. 그래도 차례상에 제대로 된 두부가 있어야하지 않겠냐며 K-루트 팀중 한분이 밤새 고생하신 결과 제대로 된 두부를 얻을 수 있었다. 오후에는 다같이 전도 부치고 설 음식도 준비했다. 모든 대원이 나와서 전을 수백장씩 부치는 모습은 장관이었지만 나도 설 음식 만드느라 바빠서 사진을 못찍어둔게 아쉽다.
설 당일, 차례상을 차리고 세배하고 대장님께 세뱃돈도 받았다. 아직 환전 못한 호주와 뉴질랜드 돈. 윷놀이도 K-루트팀과 월동대 OB YB 세팀으로 나눠서 했고, 내가 속한 YB팀이 1등을 하지 못했다. 1등에게만 상금이 있었는데...
날씨가 괜찮아서 저녁엔 이탈리아 기지를 방문했다. 한국 명절인 설날에 타 기지를 가다니 묘했지만 아무튼 좋다. 토요일은 pizza day 라서 온갖 종류의 피자를 맛볼 수 있었다. 언제 또 본토 피자를 먹어보겠냐는 생각에 피자만 12조각은 먹은 것 같다. 그중 제일은 가지피자. 처음 마주했을땐 아니 왜 가지를 피자에 올리지 싶었는데, 구운 가지가 맛있다는걸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호기심으로 도전해본 거였는데 너무 맛있어서 놀랐다. 다른 피자들이 좀 짰던것도 있지만.. 가장 먹기 힘들었던건 앤초비같은게 올라간 피자였는데 비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지하게 짰다. 사실 가장 기대했던건 아이스크림이었다. 젤라또 기계가 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젤라또인지는 모르겠지만 레버를 당기면 쭉쭉 나오는 소프트아이스크림 기계가 있긴 했다. 기대만큼 맛있진 않았지만, 얼마만의 소프트아이스크림인지. 에스프레소의 본고장답게 커다란 기계도 있었는데 호기롭게 한잔 내려 마셨지만 역시 겁나 썼다. 원래는 설탕을 잔뜩 넣어서 먹는거라면서요..? 아포가토를 해 먹을걸!
기지 한편엔 기지가 처음 건설된 1983년때의 건물이 남아있어서 구경도 하고 흔적을 남기고 왔다. 모든 곳에 방명록이 남겨져있었지만 유일하게 손을 타지 않은, 문의 옆면에.
이탈리아 기지에 대한 인상은 일기장에
‘마리오 주켈리!오래된거 치곤 내부는 좋았다. 외국인 냄새. 유쾌한 사람들...피자, 맥주, 디저트, 커피. 재밌었다. 외국인에 둘러쌓인건, 그러면서 밥먹는건 거의 처음같은데. 이방인이라는 기분.’
흠 지금 생각해보니 둘러싸여 밥먹은건 외국 나갈때마다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저런 기분이 들었을까.
설 다음날엔 한국 축구팀 경기가 있어서 치킨을 먹으며 중계를 봤다. 형님중 한분이 배워온 비법으로 만든 치킨이었는데 정말 맛있었고, 기지 인터넷을 다 차단하고 중계만 연결했는데고 공이 보일락말락 했지만 그냥 그 분위기와 상황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