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인태 Mar 08. 2021

남극만 아니면 된다 병 발병

본격 노잼 현타 시기 돌입

 4년쯤 전에 제대하면 제주도 가서 살아보려고 정보를 수집하던 중, 육지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분의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 탈출구를 찾아서 왔지만 그곳이 삶의 터전이 되는 순간 또다른 탈출구가 필요해진다는 요지의 문장이 있었는데, 남극에서 정말 뼈저리게 공감했다. 밖에 나가도 별게 없고 사람들도 많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도 한정적이어서 그런지 탈출구가 필요한 시기가 생각보다 빠르게 왔다. 결국 탈출구는 없었고 탈출함으로 끝맺었지만.


 남극에 온 지 2개월 정도 됐을 무렵인 1월초, 아주 강하게 향수병이 도졌다. 햐 근대문학에서나 보던 노스탤지아라니,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놀라웠다. 아, 더 정확하게는 '남극만 아니면 된다' 병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 세계 어디든 괜찮으니 남극에서 나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그때 제일 그리웠던 게 카페가서 커피마시고 공원 벤치에 앉아서 사람구경하고 영화관가서 영화보고 밤에 산책나가고 이런거였다. 참 사소한 것들이다. 근데 거기선 못한다.


 '여행의 이유' 에서 김영하 작가가 여행은 '일상의 부재' 라고 했는데 거기선 좋은 의미였지만 남극에선 다른의미로 일상이 부재해서 문제다. 일상이 그리워진다. 친구들과의 수다, 학교, 수업, 동아리, 버스, 지하철, 미술관, 마트, 편의점, 왁자지껄한 식당과 부산한 도시, 모르는 타인, 강아지, 고양이..


 그래서인지 가끔씩 뭘해도 재미가 없는 노잼 현타시기가 온다. 영화 책 피아노 드럼 운동 다 재미가 없어지는 시기. 빠르면 4일만에, 길면 한달 주기로 찾아오는데 이 얘기를 들은 분의 "없는것만 찾는데?" 라는 말씀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여기서 행복을 찾자는, 군대처럼 제대만 기다리고 살기엔 아깝다는 생각. 그렇게 3주정도는 잘 지내다 다시 한국이 그리워졌다.


 총무님한테 이 얘길 하니 코웃음을 치셨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이해가 간다.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즐겁던지. 세상엔 아직도 재밌는게 너무 많아!


 또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어있으니 (2월 중순부터는 28명 정도 있었고, 월동 들어가면 18명이 7개월동안 부대끼며 살아가야한다) 다양한 관계에서 충족되는 걸 느끼기 어려웠다. 물론 5개월 정도면 할만하긴 하다. 아직 형님들 얘기도 흥미로운게 많았고, 크레인 운전법도 배우고 왜 눈이 결정 그대로 내리는지 논문 설명도 듣고 하면 재밌다. 너무 길어지면 문제지.


 일기엔 큼지막하게 노잼이라는 타이틀을 달아놓고 쓴 글들도 있다. 그 중 일부는


노잼 현타시기를 맞이하니 약간의 걱정이 생겼다. 여기에 24세에 남극에 왔다는 것까지 더해져 앞으로의 삶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될수도 있겠다 하는. 별 기쁨이 없을수도 있겠다, 이룰 것도 없겠다 하는...


 이렇게 심적 여유가 없어지다보니 크고작은 불화들도 생겼다. 나름 인격적으로 성숙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멀었구나를 깨달은 시간. 돌이켜보면 이런게 제일 힘들었는데 어쩌면 이런 상황 속에서 2달 넘게 별 탈 없이 지낸것조차 다행일지도 모른다. 와중에 모든걸 받아주고 허허 웃으며 대해주던 형님들은 아직도 존경스럽다. 분명 얼마 전까진 직장의 3요소인 일/관계/급여가 모두 완벽한 곳이었는데 어느새 그 반대가 되어버렸다. 급여는 충분히 높긴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탈출하고 싶다고!


 게다가 결혼하고 자녀가 있으신 분들의 마음은 내가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매일 저녁 집에 영상통화를 걸어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시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찡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덜 반긴다는 농담엔 뼈가 있어 슬픔이 서려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포기할게 많고 잃을게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젊어서 그런지 이런 부분이 적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고.


 한편으론 건강도 문제인데, 나는 5개월이지만 월동대는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치과 및 건강검진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보다 육류랑 인스턴트 섭취량이 엄청 증가한다. 1.4톤의 삼겹살과 안심 등심 양갈비 과자 음료가 무제한인 공간을 상상해보라. 천국..! 좋긴 하지만 1년동안 그렇게 지낸다면 건강이 몹시 나빠질것 같다. 난 그래서 적당할 때 나온 것 같다. 즐길거 다 즐기고 오로라까지 보고.


 그럼 다시 가고 싶냐고? 당연하지. 다시 가면 훨씬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단, 최대 4개월까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