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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콕 중 통역사 Oct 21. 2021

딸아이의 태초

01. 레이스 스타트

태초란 무(無)에서 유(有)가 되는 가장 '첫' 시작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 생명의 태초는 언제일까?

배에 대롱대롱 달린 생명의 동아줄로 산소를 공급받다가 난생처음 폐로 공기를 들이마신 그 탄생의 순간?

태초라고 하니, 그것보다는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3억 마리 중 가장 팔팔한 올챙이가 경쟁에서 이겨 의기양양하게 방으로 입장한 그 순간?

아니면, 좀 더 전으로 가서 런닝맨의 지석진이 느끼한 목소리로 외치던 "레이스 스타트"처럼, 아직 누가 이길지 질지 모르는, 아니 누가 살아남을지 죽을지 모르는 올챙이들만의 긴장 백배 경쟁이 시작된 순간?


어떤 일을 계기로 한 생명의 태초가 언제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나에게 생명이란 내 목숨보다 귀한, 내가 이 세상에 만들어 낸 생명, 하나밖에 없는 내 딸아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딸아이의 태초가 궁금해졌다.


첫 번째 경우, 탄생의 순간이라고 본다면 다른 그 어느 날짜보다도 잘 기억할 수 있다.

두 번째 경우, 수정의 순간이라면 아무 기억이 없다. 사실 난 곰과 여우 중 여우과인데, 얼마나 여우냐면 남편이 나를 곰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곰 흉내까지 낼 수 있는 여우과라는 말씀. 그런데도 기억이 없다니, 이 순간을 눈치채려면, 정말 예민한 여우 아니 구미호 정도는 돼야 가능하지 않을까.


마지막 레이스 스타트라고 본다면, 까딱하다가는 글이 삼천포로 빠질 것 같다.

타자 한번 잘못 쳤다가는 독자들을 19세 이상으로 제한해야 할 것이고, 술이라도 한잔 걸쳤다면 29세 이상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쓰다가 흥이라도 생기면 나보다도 나이 많은 독자들만 받아야 할 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딸아이가 아직 올챙이였을 적 참여한 그 레이스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다행히 손가락을 다치지도 술을 마시지도 기분이 엄청 좋은 상태도 아니니 조심스럽게, 어쩌면 아무도 관심 없을 내 딸아이의 태초 레이스를 적어보려 한다.

가끔 감사하게도 공휴일이 주말과 사이가 좋아져 붙어있으면, 3일을 내리 쉴 수 있는데 그때도 그런 운 좋은 휴일이었다. 그리고 바다가 보고 싶었던 신혼부부는 동해를 종착지로 결정하고 열심히 짐을 싸는 중이었다.

대충대충 옷 몇 벌 챙기는 자칭 곰 같은 여우 부인과는 달리, 원래도 워낙 꼼꼼한 성격의 남편은 면봉과 치실 같은 아주 사소해서 안 챙겨도 크게 아쉽지 않을 소소한 것까지 챙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머릿속에 번쩍하고 생각 난 준비물이 있었으니 바로 피임을 위한 바로 그것이었다. 신혼부부에게, 심지어 여행을 떠나는 신혼부부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준비물이 있으랴.

하지만 꼼꼼한 성격의 남편은, 그 순간만큼은 세네 살짜리 아이가 대충 눌러 붙여 종이에 완벽히 접착되지 않고 엉성함을 뽐내는 스티커처럼,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엉성한 스티커를 붙인 순진무구한 세네 살 아이처럼 피임도구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먼저 내가 챙기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던 게 당시 난 부끄러움이 많은 새댁이었다.   

결국 난 마치 주방 선반에 동생 모르게 달콤한 쿠키를 숨기는 모양새로, 여행가방 깊숙이 나만 발견할 수 있는 주머니에 중요한 그 준비물을 넣었다.


동해 여행을 압축해둔 비디오가 있다면 [10초 뒤로 가기]를 계속 툭툭 눌러 밤인지 새벽인지 모르는 시간으로 오면 된다. 그러면 내가 예상했던 대로(?)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잡히는 순간의 장면이 뜬다.

순진무구한 세네 살 아이에서 다행히도 자기 나이를 찾은 남편은 피임도구를 안 가져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당황한 듯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남편이 고심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아뿔싸 싶었다. 선반 깊숙이 쿠키를 숨겨 놓을 줄만 알았지, 그걸 건네야 할 순간이 오면 어떤 식으로 꺼낼지 시나리오를 생각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내가 그린 시나리오는 이런 것들이었다.

무심한 척 건네기: "아 그거? 여기"

핀잔을 주며 건네기: "으이그~ 이걸 내가 챙겨야겠어?"

귀엽게 애교 부리며 건네기: "짠~ 여기 있지롱"


그런데 아무리 그려봐도 내가 실행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없었다. 그나마 내 성격에는 애교를 부리면서 "짠!" 하는 게 쉬워 보였는데, 앙앙 거리는 목소리를 내며 손으로는 그걸 건네주는 게 어쩐지 매치가 안 되었다.

결국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나리오 작가 및 연기 지망생 놀이를 상상으로 해보다가 포기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내 딸아이는 치열한 레이스 스타트를 하게 되었다.


나중에 딸아이가 좀 더 커서, 이런 대화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사이가 되면 꼭 말해주고 싶다.

생각해봤는데, 너의 태초는 엄마가 "짠!" 단어 하나를 입 밖으로 내지 못해서 생긴 것이라고.

엄마가 말이야, 얼굴이 1mm만 더 두꺼웠다면, 그래서 "짠!"만 했으면 넌 그 레이스 참가도 못했을 거라고.


그런데 사실은 타임머신이 있어 과거의 그 부끄러움 많았던 새댁을 만나게 된다면,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부끄러워서 그 한 단어를 뱉지 못했던 게 천만다행이라고. 그 덕분에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중하고 값진 선물이 나에게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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