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콕 중 통역사 Oct 21. 2021

지켜야 하는 연두부

05. 힘들게 살아남은 첫 주말

난 수면욕이 강한 낙천적인 사람이다.

수면욕과 낙천성의 관계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질문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데, 잠이 많아서 낙천적이게 된 건지 혹은 낙천적이어서 잠이 많은 건지 어떤 것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어쨌든 잠이 많은 사람은 대게 낙천적이고 낙천적인 사람들은 대게 잠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아기를 낳기 전까지 나는 이 둘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출산 후 절대적인 수면시간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곤두박질치자, 내 뇌는 마치 그 그래프가 전재산을 몰빵한 주식 그래프라도 된 듯이 미처 날뛰기 시작했다. 내 수면시간 그래프는 분명 다른 산모들의 것보다 훨씬 처참하게 그려진 상태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그 시작은 꼬물거리는 아기를 낳기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후조리에 대한 고민을 하던 시기, 한 산후조리원의 아동학대 및 청결 문제 등을 취재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이 때문에 가까이 사시는 친정엄마는 함께 아기를 볼 테니 산후도우미를 부르자는 의견을 내셨고, 남편은 남편대로 저녁 및 주말 동안은 본인이 팔 걷어붙여 돕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이었다.  

여러 고민 끝에 결국 난 산후조리원이 아닌 "주중에만 오시는" 출퇴근형 산후도우미 이모님을 예약하였다.


"포"가 세입자 놀이가 지겹다며 짐을 싸고 밖으로 나온 날은, 다른 날도 아니고 "목요일"이었다. 내가 이 요일을 잊지 못하는 것은, 자연분만을 성공한 산모는 병원에서 2박 3일 후 퇴원하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내가 퇴원을 하는 날은 산후도우미 이모님이 안 계시는 "토요일"이 되는 것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친할머니가 갑자기 아프셔서 입원을 하셨고, 부모님은 태어난 손주가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무사히 도착한 것만 확인하신 후, "월요일에 올게"하시며 바로 지방으로 내려가셨다. 그렇게 갓 태어난 아기는 첫 주말을 육아에 한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말 그대로 똥멍충이 부부의 손에 맡겨지고 말았다.


병원에서 퇴원을 하는 날, 아기를 건네주던 간호사는 아기의 말랑말랑한 정수리 부분을 우리 부부에게 직접 만지게 하며 대천문*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나름 임신 기간 동안 보건소에서 진행한 임산부 수업도 참여해보고 인터넷 카페도 여기저기 가입해서 공부를 했건만, 나는 아기의 정수리가 그렇게 물컹물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침용 두부도 아니고, 두부 중에서도 제일 연해 씹기보다는 차라리 마셔야 할 것 같은 그런 연두부 느낌이었다.


뒤이어 간호사가 병원에서 기록한 아기의 수유 일지를 주는데, 수유 텀, 수유시간, 수유량 등등이 적혀있는 그 수유 일지를 보니 아기의 연두부를 만진 후 충격받은 머리가 더 새하얘지는 느낌이었다.

퇴원을 한다고 생각하니, 마치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수능 시험장에 들어가야 하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혹은, 돈 한 푼 없는 채 거리로 쫓겨나는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수유 일지를 준 간호사의 다리라도 붙잡고 이번 주말 동안만 병원에 있으면 안 되냐고 울고불고 매달리고 싶었지만, 다행히 그때까지는 내 뇌가 정상 작동 중인 때라 그런 드라마틱한 일은 머릿속에서만 그려지다 말았다.   


집에 온 첫날, 초보 엄마인 난 배고파 우는 아기에게 젖을 먹여보겠다며 커다란 수유쿠션을 무릎에 올리고 의자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초보 아빠인 남편은 자신의 팔뚝보다도 작은 꼬물이를 아주 조심스럽게 안고 한 발짝 한 발짝 띄며 나에게 다가왔고, 난 입가에 아마도 살짝 미소를 머 금채 그 모습을 정면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을 남편이 내가 보는 세네 발짝 앞에서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넘어지는 1초의 그 짧은 순간 남편은 바로 옆 이불이 푹신하게 말려있는 침대 위로 아기를 슝~하고 던졌다.


죽을 수도 있는 큰 사고를 당하는 순간, 시간은 마치 착한 마법사가 등장하여 사고를 피하라고 기회라도 주는 듯이, 엄청 느리게 흐른다. 남편이 미끄러지고 아기는 공중으로 뜨는 순간, 째깍째깍 돌아가는 초바늘 소리 사이로 밀리초, 아니 마이크로초를 셀 수 있을 만큼 내 시간은 정체되었다.


성충이 된 하루살이가 날아도 보고, 연애도 몇 번 하고, 실연도 당하고, 딴딴 딴 반주에 맞추어 결혼식장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싶었을 때, 눈을 다시 깜빡여보니 남편은 발을 잡고 바닥에서 뒹굴고 아기는 침대에서 울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둘 다 무사했다.


그런데 그 일로 무사하지 않았던 건 나였다. 갓 아기를 낳아 신체 호르몬이 뒤죽박죽인데, 그런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고 나니 갑자기 내 뇌는 먹통이 되어버렸다. 밑도 끝도 없이 아기가 죽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지속되는데, 실제 아기는 안전하니 그 두려움은 원인모를 불안감으로 뒤바뀌었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이면, 이 불안감은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커져버려 난 마치 잠들지 못하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처럼 아침까지 꼬박 아기 근처에서 입을 틀어막고 흐느꼈다.


돌이켜보면, 연두부 사건이나 공중부양 사건이 트리거 역할을 했을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오락가락하는 호르몬이 만들어 낸 극심한 산후우울증이었다.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우울한 기분은 반나절도 되기 전에 털어낼 수 있던 나였다. 그래서 평상시의 성향과 성격을 믿고 산후우울증은 나에게 닿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혹시라도 나처럼 자만하는 예비 엄마가 있다면,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그리고 혹시라도 나처럼 세상에 홀로 남겨진 마음으로 울고 있는 초보 엄마가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달래주며 두 팔 벌려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걱정하지 마세요,

모두 잘 될 거예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아기는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 당신의 인생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줄 거예요.























*대천문: 태어날 때 산도를 유연하게 빠져나올 수 있도록, 또한 뇌가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신생아의 두개골은 성인과 달리 완전히 봉합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 닫힐 때까지 신생아의 두개골에는 숫구멍이라고도 불리는 말랑말랑한 부위가 2곳 (대천문, 소천문) 있어요.








 

 






         

이전 04화 남편의 한 손가락 서포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