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콕 중 통역사 Oct 21. 2021

남편의 한 손가락 서포트

04. 나의 출산 일지

한참 육아에 지쳤는데, 또 아가는 너무 예쁠 때 내가 쓴 글이 있다.

 


악마 vs 천사

난 졸려 미치겠는데 안 자고 징징거리는 악마
그런데 막상 잠들면 이 세상 어디 없는 천사

겨우 날 위한 밥상을 차리고 허겁지겁 먹으려는데 응가를 눈 악마
참을 인(忍) 새겨가며 기저귀 갈아주면 날보고 환하게 웃어주는 천사

티브이도 보고 싶고, 컴퓨터도 하고 싶은데 그럴 시간을 허락 안 해주는 악마
그래서 짜증 나서 누워있으면 신나게 기어 와서 뽀뽀랍시고 침 세례를 해주는 천사

하루하루 커가며 생떼가 늘어나는 악마
그런데 그만큼 또 애교도 늘어나는 천사

내 남편의 마음을 빼앗어간 악마
그런데 내 마음도 빼앗어간 천사

 


이렇게 보니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날'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혹은 '악마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날'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대망의 출산일을 앞두고도 "포"는 나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출산일은 가을 끝자락에 예정되어 있었는데, 나는 한여름에도 택시기사 아저씨가 "아이고, 오늘내일 아기가 나오겠네!" 하는 말과 함께 걱정 어린 시선을 건넬 정도로 배가 남산만 했다.


아니, 남들은 남산만 한 배를 자랑할 때 내 배는 서울에서 가장 높다는 북한산만 한 게 분명했다. 다시 가벼워진 몸으로 움직이고 싶은 나의 갈망이 날로 커졌다. 인생 선배들이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좋은 때야"라고 했지만, 경험해보지 않은 나에게 그런 이야기는 고막까지 도달하기는커녕 내 귓바퀴를 타고 미끄러지기 일수였다.


출산 예정일을 하루 앞두고, 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비싼 소고기로 저녁을 아주 든든히 먹고, 잠들기 직전까지 온 바닥을 걸레질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체벌의 한 종류로 자주 받아봤던 토끼뜀 자세를 하고, 구석구석을 닦아내며 '포야~ 이제 그만 나오자'라며 배를 토닥였다.

그리고 약 3시간 정도 지난 새벽, 양수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병원으로 가는 길 잔뜩 긴장을 한 나와는 달리, 남편은 지난 10개월간 기다려 온 우리의 아가를 드디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어두운 차 안이 빛날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설레어했다.

평범한 회사원인 내 남편은 일주일에 4~6일은 헬스장에서 꼭 시간을 보내는 근육맨인데, 어느 정도냐면 남편을 트레이너로 착각한 헬스장 회원들이 가끔 있어 기구 사용법을 묻거나 자세를 잡아달라며 귀찮게 했다.

성격으로나 덩치로나 듬직함을 자랑하는 남편과 함께라니... 어느덧 긴장감은 점차 사라지고 남편의 설렘이 나에게도 옮는 듯했다.  


분만 시 남편의 역할은 분만의 종류마다 또 병원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다.

내가 갔던 병원에서 겪은 분만 과정을 다시 전체적으로 돌이켜 볼 때, 그날 남편에게 주어진 역할은 크게 2가지 정도가 있었다.

1. 분만 대기실에서 분만 촉진 자세 돕기

2. 분만실에서 손잡아주기


분만실에서는 "포"가 너무 큰 바람에, 간호사 두 분이 내 배 위에서 아이를 세게 밀어주는 다소 낯선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 바람에 놀란 남편은 내 손을 잡아주기는 커녕, 저 끄트머리 벽에 딱 붙어 사냥꾼 눈을 피해 숨은 초식동물의 모습을 하고 서있었다.

하지만 이때보다, 내가 뜻밖의 분노를 마주하게 된 것은 분만 대기실에서였다.


"포"가 세상 밖을 나와보겠다고 시동을 켜고 액셀을 밟자, 엔진 소리를 들은 간호사가 뛰어와 분만 촉진 자세를 가르쳐주었다. 다리를 접은 채 하늘로 향하게 들고, 상반신은 윗몸일으키기를 한 상태에서 버티는 매우 힘든 자세였다. 상반신을 일으키고 싶어도, 배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북한산이 가로막아 그 자세를 유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내가 '꾸엑'거리며 힘들어하자, 간호사는 누가 보아도 듬직해 보이는 우락부락한 근육맨인 남편에게 "산모님 머리 좀 손으로 받쳐주세요"라고 말했다.

내 귀에는 오해의 소지가 없는 정확한 한국어였으나, 자주 헬스장을 가며 가끔 다른 회원들의 자세도 잡아주던 남편에게는 전혀 다른 '헬스 언어'로 들렸나 보다.


여기서 '헬스 언어'로 해석된 간호사의 지시는, 마치 뱃살을 빼고 싶어 하는 회원이 열심히 윗몸일으키기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뱃살을 쥐어짜는 버티기 자세를 하고 있을 때, 이 버티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트레이너가 한두 손가락을 회원 머리 뒤에 살짝 닿을 듯 말 듯 건드려주는 것이다.


남편이 한 손가락으로 내 머리 뒤를 닿을 듯 말 듯하며 서포트해주고 있는 걸 느끼는 순간, 내가 누워있는 곳의 배경이 병실이 아니라 헬스장으로 옮겨진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그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데, 그 와중에도 "포"가 내는 엔진 소리에만 집중하는 간호사는 이런 남편의 만행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산모님, 조금만 더 해보세요! 아가가 거의 내려왔어요! 곧 분만실 가면 될 것 같아요!"라고 소리치며 나의 혼을 쏙 빼놓았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의 출산 장면을 보면, 출산을 하다 말고 갑자기 억울해진 부인들이 남편의 머리를 쥐 뜯는 웃긴 장면을 보여준다. 분만실, 아니 분만 대기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내겐 그냥 '풋~ 웃기네' 하는 장면이었지만, 이제 이런 장면이 나오면 갑자기 나를 서포트해주던 남편의 그 한 손가락이 생각나 냉수를 벌컥벌컥 마신다.   









  


  









 


 

이전 03화 내 배인가 아닌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