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콕 중 통역사 Oct 21. 2021

내 배인가 아닌가

03. 배의 변화 일지

임신 초기, 난 막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한 학생이었다.


통대생의 스케줄은 대학생보다는 고등학생의 것과 더 닮아있는데, 기본적으로 주중 내내 수업이 있으며 수업 전후 빈 시간은 개인 공부 및 동기들과 함께 스터디를 하기 때문에 오전부터 저녁까지 모든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또한 준비물로 노트북과 이어폰은 기본이며, 순차통역을 위한 노트 테이킹용 수첩과 필기구까지 챙기다 보면, 작고 예쁜 가방보다는 큼지막하면서 실용적인 가방에 손이 간다.


그러한 여러 연유로 난 커다란 아쿠아 블루색의 배낭을 메고 다녔는데, 그 배낭의 남는 공간에는 일반적인 통대생의 준비물에 더해 부스럭거리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물건이 아주 잔뜩 들어있었다.

부스럭거리는 물건은 다름 아닌, 먹덧을 잠재우기 위한 과자, 사탕, 젤리 등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으면 내 통역 차례가 되었을 때, 한국어나 영어를 내뱉는 대신 어제부터 바로 좀 전까지 먹었던 음식을 위장과 식도에서 차례로 꺼내 뱉어낼 것 같았다.

먹덧이 심한 임신 초초기라 할지도 수업을 빼먹는 날라리는 차마 될 수 없었던 나는, 강의실 맨 뒤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아 교수님과 동기들 몰래 야금야금 배낭 속 간식거리를 해치웠다.


하지만, 내 옆 줄에 앉아있던 동기에게까지 이 모습을 숨기긴 어려웠다. 수업이 시작하면서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냠냠거리며 과자파티를 벌인 나를 본 동기는 조금은 신기해하며 말했다.  

"옆에서 보니까 벌써 배도 좀 나온 게 이제 제법 임산부 티가 나네!"

그런데 그 당시 나는 배가 나오려면 한참 먼, 해봤자 고작 임신 8주 정도의 초기 임산부였다.

"응, 아니야. 이건 그냥 내 배야..."


그러고 보니, 데자뷔 현상 같다.

내 똥배는 이전에도 딱 한번, 꼭 지금처럼 지방이 아닌 소중한 생명체가 들어있다는 오해를 받은 적이 있다.  


신혼여행으로 떠난 발리에서 마사지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엎드린 내 등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척추를 따라 때로는 강한 압으로 피로를 풀어주었다.

현지 마사지사는 나를 톡톡 치며 돌아누우라는 신호를 주었고, 매우 릴랙스 된 상태의 나는 아무런 긴장감 없이 앞으로 휙 누웠다. 그 순간, 그 마사지사는 엄청 깜짝 놀라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보고 눈물까지 거의 글썽이는 게 아닌가.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 그러냐고 묻자 마사지사는 짧은 영어로 내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Baby... baby..."


Baby라니, 아니 이게 무슨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아니 강아지는 실제로 풀을 먹기도 한다고 하니,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닌가.

잠깐,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저기요! 이거 제 배거든요!"

정신을 차리고 영어를 못하는 상대에게 손짓 발짓해가며 오해를 풀던 나는 "풋!!!"하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엎드린 임산부를 꽉꽉 눌러버린 자신에게 닥칠 미래라도 생각 중인 건지, 초점 잃은 눈으로 망연자실해있던 마사지사는 그제야 나와 함께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누워 마사지를 이어받는데, 웃긴 해프닝으로 생각했던 걸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치 호주머니에 있던 만원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누구한테 화낼 수도 없고 짜증 나면서도 찝찝한 그 기분이란.  


그냥 애교로 봐줄 수 있는 사이즈의 배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Baby라니...

한참 이어진 마사지가 끝날 때까지 나는 배는 크지만 속은 좁은 밴댕이 소갈머리가 되어서는, 순진한 얼굴로 나의 자존심에 태클을 건 이 마사지사에게 팁을 줄까 말까 하는 고민을 하느라 괴로웠다.




고통스러운 먹덧이 가시고 임산부 테가 나기 시작한 임신 중기에 접어들자, 내 똥배는 급격한 신분상승을 이루어내었다.


길 가다 마주친 동네 아줌마들은 내 배를 사랑스럽게 봐주었고,

버스에서 만난 낯선 총각들은 내 배를 보면 자리를 양보해주기 바빴으며,

내 인생 짝꿍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내 배를 어루만졌다.


가리기 급급했던 내 배는 갑자기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금메달이 되었고,

시간이 흘러 그 금메달은 그 어떤 단어로도 비유할 수 없는 존재를 세상 밖으로 보내주었다.


지금 내 배는 금메달에서 다시 똥배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렇다고 완전한 신분하락이 생긴 것은 아니다.

이전보다는 탄력을 잃고 조금 쭈굴쭈굴해진 배는 분명 반짝거리는 금메달은 아니지만,

열심히 일한 자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수여되는 '공로상' 정도는 되는 게 분명하다.














 


  






이전 02화 혼자 먹기 만렙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