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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기쁨이자 고통이다

뇌전증 환자에게 무증상의 기간이란

뇌전증 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난 뒤 나에겐 목표 하나가 생겼다.


약 끊기

그즈음 나는 병원을 한 번 더 바꾸게 되었는데 새롭게 처방받은 약과 그 복용량이 잘 맞아떨어졌다. 새 담당 의사 선생님은 흰머리가 지긋한 노의사였다. 그는 무증상 기간이 3년 정도 지나면 약 복용량을 서서히 줄이는 것으로 시작해 완전히 끊는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다고 했다. 복용량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다시 발작을 할 수 있는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모든 환자들이 그것을 시도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선택은 오롯이 환자의 몫이라고 말하며 동그란 안경 너머로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고.

뚜껑이 덮여 있어 안이 보이지 않는 접시가 눈앞에 있을 때, 그 안에 입에서 사르르 녹는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가 있을지, 아니면 시커멓게 썩어가는 잘린 손가락이 있을지 알 수 없을 때, 그 뚜껑을 열고 안의 내용물을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과, 그것 외에도 세상엔 맛있는 음식이 많다고 믿으며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들.


나는 전자의 사람이었다. 그 접시에 무엇이 담겼는지 꼭 확인을 해야 했다.


나는 노의사의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전 해보고 싶어요."


그때부터 나는 약 끊기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삶을 재구성했다. 뇌전증 환자에겐 반복적인 루틴과 스트레스받지 않는 환경, 충분한 휴식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이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삶의 규칙들을 세웠다:


1. 매일 출근 전 아침 운동하기

2. 채소와 단백질 위주의 건강식 먹기

3. 밤 10시 전에는 무조건 잠자리에 들기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철저하게 지켰다. 나의 원칙주의적 성향은 큰 도움이 됐다. 일주일에 적어도 다섯 번은 새벽 6시에 일어나 달리기를 했으며, 엄마께 점심 도시락 메뉴로 주로 샐러드를 부탁드렸고, 무조건 밤 10시가 되기 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주변 사람들이 나의 새벽 운동과 식습관에 대해 알고 대단하다고 할 때마다 나는 그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도 굳이 이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답니다. 


한 달, 반년, 일 년이 지나도록 나는 한 번도 발작을 경험하지 않았다. 매일이 '무증상 기간' 신기록을 경신하는 나날이었다.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기뻤다. 동시에 두려웠다. 그 마법 같은 기간이 어느 날 갑자기 깨져버릴까봐.


나는 매일 아침 오늘도 무사히 지나길 바라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회사에 중요한 행사라도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더 긴장한 채 출근했다. 혹여나 내가 중간에 발작을 해서 회사에 피해를 끼칠까봐, 동료들 앞에서 험한 꼴을 보이게 될까봐, 회사에 있는 내내 초조하고 날이 선 채로 시간을 보냈다. 뇌전증 환자들은 각기 다른 전조 증상을 겪곤 하는데, 흔히 한 번 겪는 전조 증상을 반복해서 겪는다고 한다. 나의 전조 증상은 평소 알고 있던 영어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아, 뭔가 이상한데'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재빨리 머릿속에서 랜덤한 영어 단어 하나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단어의 철자를 차례대로 다 나열하고 한국어 뜻을 기억해 낼 때까지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중 하나라도 기억나지 않으면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혼자 발작해도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감사한 것은 그렇게 내가 행사에 참여하며,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영어 단어를 머릿속에서 수십 개 떠올리는 동안에도 시간은 끊임없이 흘렀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퇴근할 시간이었다.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허둥지둥 나섰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오는 날은 마음의 에너지를 너무 쓴 탓에 집에 오면 온통 녹초가 되었다. 그저 침대에 쓰러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음 날이 되면 나는 어김없이 새벽 6시에 일어나 달리기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무리 피곤하고 몸이 무거워도 나는 운동복을 챙겨 입었다.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약을 끊어야 하니까. 뇌전증이 없던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매일의 규칙들은 나를 다시 건강하게 해 줄 거라는 하나의 신념이 되어 나를 지탱해 주었다.


비슷한 모양의 하루는 계속되었고, 어느새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갔다.


*개인 사정으로 다음 주 월요일에 글을 연재할 수 없어 오늘 미리 올립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뇌전증에 관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QnA #6

Q: 뇌전증에는 누가 걸리나요?
A: 뇌전증은 흔한 신경계 질환으로 누구나 걸릴 수 있습니다. 발병 원인으로는 선천적 원인(임신 시 발생한 염색체 돌연변이, 뇌 기형 등)과 후천적 원인(뇌종양, 뇌경색 등 뇌질환이나 두부손상으로 인한 뇌손상 등)이 있을 수 있는데, 환자의 약 50%는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

(출처: 뇌전증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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