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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Oct 14. 2024

‘최선’ 이라는 어불성설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다른 사람들에게 본인의 결혼생활이 행복하다고 떠벌리는 것 만큼 그 결혼생활의 허점과 내 배우자의 불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없다. 그 행복이라는 게 거짓말이면 거짓말이라서 문제고, 진짜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해도 마찬가지다. 행복을 떠벌리고 전시하는 크기와 횟수만큼 그 이는 잘못된 결혼생활을 하고 있을 가능성 역시 크고 많다, 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하는 얘기를 듣는다면, 내가 느끼는 행복한 결혼생활이 왜 배우자의 불행으로 귀결될 수 있는지 알게된다.


결혼해서 살다보면 느끼는 게 결혼의 태생적 속성이 ‘최선’ 과는 대척점에 있다는 사실이다. 평생을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서 하나의 결정을 내리는 데 최선이라니. 어불성설이다. 우연히 수많은 경우의 수가 맞아떨어졌을 때 드물게 최선의 선택을 할 수있을 뿐, 웬만해서는 차선의 선택을 하게 되며 사실은 최악만 피해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답은 쉽다. 나는 지금 배가 부르다, 배우자는 배가 고프다, 나는 간단한 요기만 하고 싶다, 배우자는 거나하게 차린 식사를 하고 싶다, 나는 드라마가 보고 싶다, 배우자는 뉴스를 시청하고 싶어한다, 하룻동안에도 사실 알게 모르게 배우자와 나는 수많은 결정과 선택을 하고 있다. 모르는 사이에 나는 배려와 양보를 해야하고, 내키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나는 서울에 살고 싶다, 배우자는 본가가 있는 지역에 내려가고 싶다, 나는 아파트에 살고 싶다, 배우자는 주택에서 살고 싶다, 나는 한 명의 자녀만 원한다, 배우자는 다자녀를 갖고 싶다, 큰 틀을 놓고 봤을 때 반드시 결정을 내리거나 선택을 해야 하는 가치관들이 수두룩하게 산재해 있다. 혼자였다면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에 기혼자는 매순간 소환되어 기로에 서야한다. 그런 와중에 상대의 취향, 기분, 가치관, 세계관까지 고려해줘야 한다.  서로 악의적으로 상대방을 괴롭히는 게 아니다. 그저 둘이라는 숫자가 , 배우자라는 사이가, 효율성과 가성비, 경제성과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미 갈등의 씨앗이 내포되어 있어서 그렇다. 결혼생활에 만족도가 높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러니까 상대방에게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봐야 한다. 상대방이 본인에게 상당부분 맞춰주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뇌는 이기적입니다. 자신이 아닌 누구를 위해서 내가 희생한다는 건 아무리 뇌를 들여다봐도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건 ‘내‘가 확장된 겁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뇌는 나의 일부로 인식합니다. 나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는 거죠. 사랑을 겪으며 뇌는 변화합니다.“
김대수 <유퀴즈온더블럭>  


보통 결혼생활은 갈등의 연속이기때문에 그걸 피하고 싶은 이들은 상대와 부딪치기보다 포기나 체념을 택하면서 상대에게 맞춰주게 되어 있다. 중요한 건, 상대방에게 맞춰주느라 생긴 나의 불만과 결핍을 내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얼마만큼 감당할 수 있는가이다. 무난하고 사이가 좋아보이는 부부들은 의좋은 형제처럼 암묵적인 룰을 체득한 이들이다. 지난번에는 네가 원하는대로 했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 라는 식으로 주고받다보면 그 가운데에 양보하고 배려하는 기쁨도 큰 행복으로 다가오는데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배려받은 상대방이 본인이 배려받았다는 것을 알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표현할 줄도 알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런 부부들은 좋은 사이로 매우 오래간다. 외부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배려받는 부분만이 보이고, 사이가 좋은 것만 보이기 때문에 그들이 상대방을 위해 희생을 하고 배려하는 부분은 간과하기 쉽다. 그들은 사실 ‘차선의 결과’ 에 서로 만족하고 있는 것인데 타인의 눈에는 결과만 보이고 과정은 생략되는 셈이다.


문제는 자신의 의견만을 관철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고, 자신이 싫은 건 절대 안하는 이들이 있다. 폭력적이거나 생떼를 쓰는 사람들일거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렇지가 않다. 끊임없이 설득하고 이해시켜서 본인의 의견을 수용하도록 만들거나, 본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상대방의 이야기조차 듣지 않으려고 하는 이들은 실은 주변에 흔하게 보인다. 본인의 신념에 심취해있는 이들이다. 자칫 그들은 주관이 뚜렷하고 줏대없이 흔들리지 않는 현명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본인이 원하는 바를 논리에 근거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설득시킨다고 착각하는데, 실은 가스라이팅도 그런 방법에 기반한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바를 상대가 집요하게 강요할 때, 그게 가스라이팅에 다름이 아니다. 이런 이들은 실로 집요하고 끈기있게 자신의 의견을 상대에게 주입하기 때문에 그런 성격을 아는 상대방이 애초부터 기가 질려 의사결정에서 빠지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매순간 맞춰주던 사람은 존중받아야 할 배우자로서의 위치는 이미 사라졌고, 더이상은 나를 지울 수 없는 순간이 온다. 황혼이혼을 꿈꾸는 수많은 중년여성들이 그 방증이다. 매순간 원하는 것을 얻고 누리던 사람이 결혼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진만큼 이들은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와 불만이 높은 것이다.


내가 나일 수 있고 네가 너일 수 있는, 그 상태를 인정하고 그런 사이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줄 수 있는 배우자와 결혼해야 한다. 사실 부부가 내리는 대부분의 선택과 결정은 선호도와 우선순위에 관한 문제들이지, 옳고 그름에 관한 것들이 아니다. 누가 누군가를 지독하게 설득하고 옳음을 피력하고 설명하고 들이댈 필요가 사실 전혀 없다. 내가 한 번 배려받았다면, 나도 한 번 배려할 수 있는 양보와 이해, 그런 것들이 훨씬 필요한 게 결혼이다. PPT를 하는게 아니란 말이다. 연애시절부터 자신에게 나를 끼워맞추려고 하거나, 내 스타일과 다른 무언가를 하거나 바꾸도록 끊임없이 설득하는 사람, 자신의 취미생활을 인정해달라는 걸 넘어 같이 하자고 종용하는 사람, 신념을 나에게 주입하는 사람, 그리고 총체적으로 자신의 말이 무조건 맞다고 악다구니 쓰는 사람은 피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내 뇌는 내 존재의 확장이라고 본다고 뇌과학자가 한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이야기 했다. 상대방을 위해주고 배려해준다는 건 결국 나의 행복과 나의 사랑의 완성을 위해 불가결하다는 얘기가 된다. 사소한 배려와 사소한 다정함들이 모여 내 배우자의 기쁨이 된다면, 나중에 그 기쁨은 나의 것으로 돌아온다. 매 순간의 결정과 판단이 나에게 최선일 순 없더라도,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최선의 결정보다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사랑의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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