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먹는 반찬을 유심히 보는데 거기엔 손을 안 대거든. 나 많이 먹으라고. 난 그런 다정함을 지능으로 보거든. 상대를 안심시키는 반듯함 같은거. 그런건 하루이틀에 쌓이는 게 아니니까.
비교적 최근 보았던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에 나왔던 여주인공의 대사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배우자의 다정함, 그 무게와 위력은 생각보다 엄청난 것이어서 나는 여주인공이 말하는 다정함이 지능이라는 말을 뼈속까지 공감한다. 마치 의사집안에 의사나고 변호사집안에 변호사나듯 다정한 집안에서 다정한 사람이 길러진다. 이걸 문화유전(meme) 이라며 소개했던 <영재발굴단> 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밈이라는 것은,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유전자> 에서 처음 썼던 개념으로 본래 한 문화권 내에서 공통성, 문화적 개성을 담고 습득 모방, 변용되는 문화적 성질이라고 한다. 이걸 축소시켜보면, 가정 내에서도 부모의 성향, 습관, 특성과 같은 가풍이나 문화는 신체적인 부분 못지않게 자식에게 대물림된다는 얘기가 된다. 사려깊은 다정함, 고요한 침착함, 요동치는 불안함, 한 사람의 세계를 지배하는 이런 특성들은 대부분 부모와 가정의 분위기에서 기인한다. 하루이틀에 쌓이는 게 아니라, 가정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에 걸쳐 그 사람의 유전자에 깊이 새겨진다. 결혼은 그러한 배우자를 뿌리째 뽑아다가 내 옆에 옮겨심는 일이다. 배우자에게 나역시도 그러할 것이다. 그 사람의 직업, 사는 곳, 재산, 외모같은 보이는 부분뿐 아니라 세계관, 가치관, 철학, 성격을 같이 데려오는 일이다. 또 그 세계가 만들어지고 다듬어지고 완성되었을 '집안'까지도 내가 껴안아 데리고 오는 일이다. 밈과 밈이 만나는 게 결혼이다. 뿌리부터 시작해 굵은 몸체에서 뻗어난 줄기들, 거기에 풍성하게 매달린 나뭇잎과 그 끝까지 뻗어있는 미세하고 숱한 잔가지들은 미약한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여러가지 상황을 맞닥뜨릴 때, 대처하는 사람의 모습과 닮았다. 뿌리끝에 녹아있는 그 사람의 세계관에서 잔가지 까지 뻗어있는 모든 생각과 행동의 집합체가 그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그 집안의 분위기, 부모님의 성격과 가정환경, 부모와 형제와의 관계를 확인해봐야 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이 사람이 다정함이라는 지능을 가졌는가, 좋은 성격이라는 유전자를 가졌는가, 는 결국 ‘내 아이에게 어떤 부모가 되어줄 사람인가.’ 혹은, ‘내 부모에게 어떤 자식이 되어줄 사람인가‘ 의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생활의 위기야 언제든 숱하게 찾아오는데 비교적 잘 맞고 잘 살던 부부마저도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 순간이 몇몇 있다. 그 중에서도 누구라도 동감할 부분이 양가의 대소사, 출산과 육아다. 우리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 다른 가족의 구성원이 끼어들게 되면 물밑에서 웅크리고 있던 서로의 생각과 성격의 차이들이 비로소 밖으로 드러나게 되고 이건 단순한 생각의 차이가 아니라 실은 두 집안의 문화와 세계관이 격돌하는 현장이랄 수 있다. 이 때에 발현되는 결정적인 부분들이 바로 그 사람을 만든 밈에서 나온다. 특히 육아 문제는 연애할 때는 사실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배우자가 아이에게 어떠한 부모가 되어줄 지는 결혼과 출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나는 친구들이랑 배우자는 긁지않은 복권이라는 얘길 종종 했었다. 비교적 자상하고 성실하며 다정한 연인도 아이에게는 서툴거나, 무관심하고 차가울 수 있다. 그이가 그런 가정에서 컸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연애감정과 로맨스처럼 책이나 영화에서 배울 수가 없는 부분이 육아인 것이다. 아이를 예뻐하는 것과 아이와 일상을 보내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놀이공원에서 하루 신나게 놀아주는 것과, 밤새 아픈아이의 병간호를 하는 건 다른 얘기다. 생일파티를 성대하게 해주고 요란한 축하를 해주는 일과 집에서 밥을 같이 차려먹고, 아이를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잠자리를 봐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부모라면, 전자보다는 후자를 같이하는 쪽이다. 이런 부분은, 본인이 자라면서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고 커왔는지, 어떤 형태의 사랑을 받았는지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고, 성인이 되었어도 그 가족의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 나의 연인과 부모가, 그 부모 서로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내 연인은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는가를 보면 긁어보지 않은 복권을 다는 볼수 없어도, 옆귀퉁이의 모양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그럼 딩크로 살기로 결심한 부부와 양가의 부모님이 안계신 부부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문제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내아이에게 어떤 부모인가, 내 부모에게 어떤 자식인가, 의 답은 내 배우자는 얼마만큼 올바르고 좋은 사람인가하는 부분과도 맞닿아 있다. <사랑의 이해>에서 여주인공이 얘기한 것처럼 나를 언제든 안심시키는 믿음직스럽고 튼튼한 뿌리를 내어주는 사람. 그게 결국 다정함이다. 내 아이랑 같이 내보냈을 때 무단횡단을 하지 않고,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리지 않을 사람. 배우자의 지인을 길에서 만났을 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손에 간식이라도 쥐고 있었다면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 무거운 물건을 들고가는 어르신을 마주치면 잠깐이라도 들어다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소한 다정함들이 모여 그를 바른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이런 걸 아는 사람은 이 사사로움으로 사회에서도, 조직안에서도 늘 옳진 않지만 그릇되거나 틀린 길로는 가지 않을 사람이라는 안정감을 주는 배우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험하고 먼 여정도 함께할 만하지 않을까, 하는 용기가 결국에는 거기에서 나올 수 있다. 서로 옆에 심은 두 그루의 나무가 되어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버텨내는 동반자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내게 들려준 명언은 손에 꼽기 힘들 정도로 많았지만, 그 중에 이 글과 어울리는 걸 하나 골라보자면 ‘장인이 사위낳고 시모가 며느리 낳는다’ 했다. 그 말인즉슨, 내가 배우자의 부모에게 하고 있느 모습, 내 배우자가 내 부모에게 하는 모습들이 곧, 훗날 내가 사위와 며느리에게 대접받는 모습일거란 말이다. 맞다. 자식들 앞에서 내가 부모와 배우자의 부모에게 하는 모습, 그걸 아이들이 보고 배운다. 나역시 그걸 보고 배웠다. 내가 어떤 가정을 꾸리고 어떤 밈을 자식들한테 물려줄 수 있을지, 를 전적으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타이밍이 지금이란 얘기다. 내 아이들에게 안전한 부모가 되어줄 배우자를 골라야 한다. 내 부모에게 잘 할 수 있는 배우자를 골라야 한다. 충분조건은 아닐 수 있다. 그런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어도 태생이나 천성이 그이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필요조건임에는 틀림없다. 평화롭고 단란한 가정에서 자란 이는 그역시 튼튼하고 깊고 너른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 가정을 들여다보는 건, 나중에 내가 꾸리고 누릴 가정의 거울을 미리 엿보는 일이다.
우리는 그 사람의 집주소, 직업, 재산, 출신 학교를 다 알고 결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이가 ‘어떤 사람’ 인가가 훨씬 중요할 수 있는 문제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을 하는 열에 여덟 아홉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모른 채 결혼을 하게 된다. 그 불확실한 모험에 눈을 가린채 뛰어들기에 나와, 내 부모, 태어나지 않은 내 아기는 너무 소중하고, 부모와 아이가 없이도 내 남은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복권은 긁기전에는 절대로 알 수가 없지만 배우자는 앞서도 얘기했지만 그래도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이다. 요모조모 따져보고 이리저리 재본다면 실패할 확률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러니, 연인의 가정과 부모를 보면, 나와 내 배우자의 현재와 미래가 비쳐있다. 그건, 제발 나와 너 우리 둘만 행복했음 좋겠어, 라든가 양가부모한테는 각자 잘하자, 라든가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서로에게 서로를 안심시키는 ‘다정함’ 이라는 유전자가 있는가, 라는 문제다. 지금 당신의 옆에 뿌리째 옮겨 심고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뿌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반드시 살피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