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에서 가까울 것
2.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수준의 보상이 있을 것
3. 생계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을 것
4. 동료들과 기가 막히게 궁합이 맞을 것
5. 일이 보람되거나 성취감있을 것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낀, 직장생활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들이다. 위의 다섯 가지 항목 중에 두가지 이상에 해당하면 직장에 나갈 강한 동기가 되고, 해당되는 항목이 많을수록 만족도는 높을 것이다. 그렇지만 단 한가지만 성립해도, 직장은 그럭저럭 다닐만 한 곳이 되고, 다녀야 하는 곳이 된다. 바꿔 말하면 나는 내가 다니는 직장에 오늘 당장 사표를 던진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는 얘기다.
고시낭인으로 직업에 대한 태생적(?) 실패를 가진 나에게는 직장에서 얻고자하는 자존감이 있었고, 직업이 가져다주는 성취감과 사소한 보람에 대한 목마름이 늘 있었다. 직장동료들과의 끈끈한 전우애에 대한 환상같은 게 있었다. 그런건 현실에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불혹의 나이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알게 되었다. 언제부터 꼬인 것인지,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고민하고 집요하게 물을수록 한쪽다리가 짧은 의자처럼 삐걱댔다. 다각도로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직급으로도, 나이로도, 사는 곳으로도, 업무로도 섞이거나 앞서갈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아니 따라잡는 일도 버겁고 실상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말하자면, 애초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고 해석할 내용도 정의내리고 분석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자아실현을 꼭 직장에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려."
나에게 제발 직장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며 철저한 제3자의 태도로 일관하는 남편이 남일 얘기하듯 관찰자를 자처할 때 꼴보기 싫었던 적이 있었음을 살며시 고백한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실로 그는 이 삭막하고 살기넘치는 대한민국에서 직장생활 짬밥 20여년에 이르는 노하우와 깜냥을 가진 K-직장인이었다. 집단의 말단부터 임원에 이르는 촘촘한 직위를 모두 경험한 자의 달관과 초월같은 게 그에게는 있었다. 그의 눈에 나는 지나치게 비장했고 쓸데없이 진지했다.
그랬다. 꼭 월요일 9시에 출근을 해서 주5일을 근무하고 금요일 6시에 퇴근하는 곳만이 직장은 아니고, 사무실에서 숨죽여 일하는 것만이 직업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 직장은 자아실현을 해줄 바탕이길 바란 곳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나를 소개하는 단 한줄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든든한 울타리지만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그저 이유없이 생계를 위해 나가야 하는 족쇄일 것이다. 그것이 보통의 삶 이었다. 다들 그렇게 사는 그저 그런 삶. 왜냐고 물으면 그냥이라고 답하는 삶.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고귀하지 않다거나, 의미가 없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나의 삶에 그런 모습을 용납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실패했던 인간이니까,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니까, 내가 나를 다그치고 채찍질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 잘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많이 버는 사람이 나는 여전히 참으로 부럽다. 유퀴즈에 나와서 자신의 직업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이들을 보면 영원히 충족될 일 없어보이는 내 텅빈 우물이 초라하고 공허하다. 그러나 일복이 없는 내 삶은 뒷걸음질만 쳤었던가. 불행하기만 했었던가. 아니다. 한량처럼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도 느껴봤고, 참으면 참나무가 되고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는 무시무시한 정글의 생태계를 경험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감사하게도 생계의 최전선에 내몰려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었고, 덕분에 나를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인간으로 오인하며 그럴듯하게 괜찮은 인간인 척 살 수 있었다.
살다보면 인생은 내가 손써볼 새 없는 불공평이라는 토양위에 싹을 틔우는 법이라는 걸 깨닫는 시점이 분명히 있다. 내 마음대로 이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일이나 직업때문에 난 그걸 명확히 깨달았다. 대부분의 삶들은 그렇게 굴러간다.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려 아침에 일어나고, 듣기싫은 이야기들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고, 뒤통수에도 눈과 귀가 달려서 어디선가 내얘기가 나오는지 안테나를 곧추세우는 직장인들. 좋아하는 일을 하기위해서 싫어하는 일을 하러 떠나는 하루. 그게 보통의 하루다. 남들보다 못가진 것들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지만 그래서 하나나 두개 쯤은 나도 다른사람들보다 더 누리는게 있음을 알아가는 삶. 싫은 걸 참아내는 어른들의 책임감은 얼마나 숭고한지, 그동안 남편의 어깨위에 단독으로 걸쳐졌던 가장의 무게는 얼마나 실존적인 것이었는지 나도 나눠지게 되었다.
바깥으로 눈을 돌리니 즐거움은 지천에 널린 민들레 홀씨와도 같았다. 20대의 실패를 극복해야 한다는 강박을 굴레처럼 짊어진 나에게 뒤늦게 찾은 직장이란 과거의 실패를 무마시키고, 더 나은 삶을 일으켜야 하는 비장한 곳이었다.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는 반증을 직장에서 찾아야만 했다. 많은 K-직장인들은 그게 얼마나 쓸데없는 생각인지 이미 알고 있다. 바깥에서 하나 둘 즐거움을 찾아내니 직장이 그럭저럭 견딜만한 곳이 되었다. 내가 나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어떤 걸 얹어가는 삶을 살고 싶은지,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내 말초신경들은 정직하게 대답을 해왔다. 얼마 뒤 떠날 여행, 며칠 뒤 계획된 전시회와 공연관람, 맛집 예약, 가족들과의 나들이, 그런 것들을 기다리며 출퇴근을 하는 하루하루도 그럭저럭 흘러갔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직장에서 자아실현하는 사람은 정말 몇 안된다고, 지금의 나도 괜찮고 나름대로 멋있기도 하다고 얘기해주었다. 그러다가 바깥에 있는 나의 여러가지 즐거움이 또 어떤 기회로 일이 될 수도 있고,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면 꼭 회사만이 내 길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공무원, 그건 나를 이루는 수많은 조각중에 하나일 뿐이다. 내려놓고, 또 덜어내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준 남편에게 감사하다. 그는 지금 남편이 아닌 내편이다.
지금 나는 육아휴직중이다. 이 한정된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가야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곳에 꾸역꾸역 나가야할테지만, 그냥 그렇게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다. 즐거움으로 바깥을 빼곡하게 채워놓은 채로 저벅저벅 걸어갈 것이다. 보통의 삶도 행복하다. 안되는 것을 부여잡지 않고, 가진 것을 누리는 것도 재능이다. 실패했던 과거의 나를 떠나보낼 줄 아는 것도 용기이며, 무엇보다 과거의 나를 덮기위해 현재를 누리지 못하고 채찍만 휘두르는 삶은 분명 불행하다.
일복이 없는 나를 부러워하는 주변인들이 많았다. 직장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에게는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었던 마음들이었다.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싸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게 뻔한 얘길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일복좀 없었으면 좋겠다고 대꾸할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었다. 그래, 이참에 일복없이 늘어진 내 팔자를 누려보려 한다. 돈많은 전업주부. 거기에는 경멸의 냄새가 살짝 묻어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걸 바라면 왠지 무임승차하는 삶, 가치없는 인생을 꿈꾸는 것만 같아 적어도 나는 금기시해왔다. 그치만 이제 뻔뻔해지려 한다. 아니 솔직해진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나는 이제 돈많은 전업주부를 꿈꾼다. 꿈은 허락을 맡지 않아도 되고, 눈치보지 않아도 되니까, 꿈속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가지 않았고 되지 않았으면 까짓껏 번복해도 되고 재차 꿔도 되니까.
아 그래서 돈많은 전업주부가 꿈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