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에는 내가 뭘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이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서 초조하네요.“
20대의 지난한 터널을 지나왔지만,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던 서른. 그 때만 생각하면 김애란 작가의 단편 <서른> 안에 나오던 이 말이 떠오른다. 수년동안 준비하던 고시에 수차례 낙방하고 완전히 미련을 버린 뒤 나는 결혼했다. 저마다 타고나거나 가질 수 있는 복이 여러 개 있을텐데 나는 이미 부모복, 형제복은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밥을 굶거나 가난해서 결핍이 있는 삶도 아니었고, 키는 작지만 몸은 건강했다. 인복은 없는 편이라 생각했지만 내가 인덕이 부족한 탓이라 여기니 복이 없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었고 대신 책임감있고 경제관념있는 야무진 남편을 만났다. 그러나 내가 유독 박복한 데가 있었으니 일복, 그래 바로 일복이 없었다. 태생적으로 배짱이냐고 묻는 누군가가 있다면 버럭 화를 낼 수도 있다. 게을리 살지 않았다. 20대에 숨가쁘게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다만 그게 제자리뛰기에 불과했었던 거고, 열심히 치고받고 싸웠지만 그게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는 거, 그게 문제였다. 누군가 나에게 “넌 누구냐,” 하고 물어온다면 무어라고 답해야 할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저는 00이의 엄마입니다, 혹은 아내입니다, 아니면 딸입니다, 라는 말만 입을 맴돌 뿐,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결혼을 하고 나만의 가정과 울타리를 가지면 소속감이라는 것과, 그게 주는 안정감 같은 것이 있을거라 굳게 믿던 때였다. 결혼과 잇따른 출산은 그러나 나에게, 살림과 육아에도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더 확실히 각인시켜주었을 따름이었다. 결혼이 주는 안정감과, 내가 어떤 사람이고자 하는가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곧장 나와 쓸모에 대한 회의가 찾아왔다.
첫째가 다섯살이던 해, 그러니까 2016년 여름, 나는 그래서 당당히, 는 아니고 어렵사리, 겨우겨우, 가까스로 공무원이 되었다. 시험을 준비하면서 합격에 이르기까지 어디 하나 순조롭고 자연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나의 공무원 시험은 다섯살짜리 딸과 나를 위해 남편과 친정 엄마 아빠는 물론 상비군으로 내 남동생까지, 온가족이 동원되어야 하는 거대 프로젝트와 같았다. 나는 남들 공부할 때 공부하고 남들 결혼할때 결혼하는 식의, ‘남들이 할때 해야한다’ 는 말을 왜 어른들이 그렇게 읊어대는지 온몸으로 체험했다. 내 머리는 아침에는 늦게 예열됐고, 밤에는 빠르게 식었다. 아침에는 존재했던 고대의 유적지나 근현대의 사건들은 저녁때는 모두 사라진 과거들에 불과했다. 방금 외웠던 영단어는 알코올 솜처럼 빠르게 휘발했다.나때문에 모든 가족이 다 동원되었다는 죄책감과 이렇게나 멍청한 나라는 자괴감 사이의 언저리에서 나는 벼랑끝에 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이 시험에서 떨어지면 가족들을 볼 낯이 없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고 되든, 안되든, 매일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공부에 매달렸다. 합격의 순간과 희열을 아직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맞다. 나에게 시험준비와 합격은, 인간 실격과도 같던 내 터널의 한줄기 빛같은, 인생 전체를 놓고 본다고 해도 특별하달 수 있는 선물같은 이벤트였다. 그 때 나에겐 그런게 필요했다. 그럴싸한 업적과 적절한 포상이 고팠던 시기였다. 그런 것들이 나의 쓸모에 대한 증명이며 나를 존재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남들보다 조금은 늦었지만, 딱 늦은 그만큼 더 늦게까지 가늘고 길게 가면 되는 거였다. 아이는 이제 6세가 되니, 육아에서도 놓여나 삶의 질은 수직상승할 것이며 우아한 워킹맘이 되는 일만이 남아있다 믿었던 그 때, 무엇이 나의 발목을 잡았던 걸까. 그때 나를 주저앉힌 건 무엇이었을까. 예고도 없이 기척도 없이 둘째가 찾아왔다. 나는 또한번 육아라는 고된 노역에 동원되어야 했고, 하릴없이 육아휴직으로 4년을 보내야만 했다. 입사와 동시에 이미 주어졌던 첫째의 육아휴직으로 둘째를 키우고 복직을 하려 했지만 때맞춰 터진 코로나로 나는 별 수 없이 1년여 이상을 더 주저앉아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납작하고 낮게라도 떠오르려는 나를 온 우주가 막아선 게 아닐까, 싶게 일복없는 박복한 내 팔자와 상황이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그때만해도 언제든 돌아갈 직장이 있다고 생각하니 살 만했고 든든한 마음마저 있었다. 주변의 지인들의 말마따나 '그냥 다니면' 되는거니까, 하는 그런 마음.
예상은 맞았다. 정년은 보장된 거였고, 꾸준히 달리기만 하면 되는거였다. 이름이 써진 내 자리는 얌전히 보전되어 있었다. 정말 그냥 다니면 될 것만 같았다. 문제는, 같이 달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거였다. 같이 입사했던 어린 동기들은 이미 저만치 삼삼오오 무리를 이뤄 달려나갔고, 같이 뛰어주며 나를 자극하거나, 혹은 내가 독려해 이끌고 가야할 이들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덩그러니 섬처럼 혼자였다. 강남으로 이사를 하고나니 고립감은 더 심해졌다. 하필, 나는, 지방직 공무원이었다. 지방직 공무원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동네가 곧 직장이 되는 직주근접과, 바로 그 점때문에 퇴사할 때까지 그동네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동료가 동네주민이었으니, 사이가 좋으면 평생친구를 직장에서 만나는 거고 틀어지면 웬수를 정년을 채울때까지 봐야 했다. 그걸 몰랐던 나는 시험을 볼 때는 서울이건, 지역이건, 국가직이건, 지방직이건, 일단 붙고보자는 마음이었으나 막상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일단 붙고봐야하는 마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게 된다. 내가 몰랐던 부분들은 어쩌면 시험을 준비하기 전에 가장 먼저 고려했어야 할 대상이었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 지, 그게 직장생활의 핵심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아무런 계획없이 시험준비를 하고 원서를 넣고 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한 나는, 이제와서 그 어떤 것도 나와는 맞지 않는 직장을 원망하고 있었다.
“에이 강남사는 분이 뭐가 걱정이에요.”
나보다 한참 어린 직원이 나한테 던진 이 말에 웃음으로 받아쳤지만 이 말은 사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고 나는 직원들과 조직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저 한마디로 판단하고 가늠할 수 있었다. 강남사는 분은 아무렇게나 일을 처리해도 괜찮다는 것일까. 경우없고 예의없어도 상관없다는 뜻일까. 짤려도 까짓것 문제될 게 없다는 의미일까. 아니 잘릴 일 없는 직장이니 아무렇게나 해보라고 판을 깔아주는 것일까. 그 어떤 의미로 던진 말이라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똑같이 일을 하고, 눈치를 봐야 했고, 평가를 받아야 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생각이었다. 동료들과의 깊은 유대감은, 우리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고 직장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었다. 직급이 비슷한 이들 사이에서 나는 나이가 많고, 아이가 둘이라 대화의 공통된 주제가 없었다. 나이가 비슷한 이들을 찾으면 그들은 이미 내가 정년까지 다닌다고 해도 달 수 없는 직급을 달고 있는 이들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사는 곳까지 다른 그들과 나 사이에는 유대감같은 게 생길 리 만무했다. 성취감 역시 바깥에서 보기에는 아무 의미없는 우물안 개구리들이 저들끼리 북치고 장구치며 주고받는 훈장에 불과할 지라도, 조직 내에서만큼은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을 생기게 하는 질료같은 보상이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는 나는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 대충해도 되는 사람, 열외가 되어도 아무렇지 않을 사람, 항상 그렇게 분류가 되었다.
"이사와야지 뭐 별 수 있나,"
라고 얘기하던 윗분도 있었다. 그러나 본인이 더 잘 알 것이었다. 생계형 가장이 아닌 다음에야 나때문에 온가족 대이동을 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아이들에게 맞춰져야 할 환경,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남편의 출퇴근도 고려해야 하는데 나좋자고 이사를 강행할 수 없다는 걸, 힘들게 육아와 일을 병행해 본 그 분은 더 잘 알 것이었다. 육아시간을 쓰고 있다는 이유로 승진에서는 애저녁에 누락됐고, 월급도 성과급도 모든게 덜 일하는만큼 책정되어 있었는데도 나는 조직에 피해를 끼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내가 이방인인 곳에서 평가받을 것도, 이뤄낼 것도, 해내고 싶은 것도 없었고 나를 가슴뛰게 할 그 어떤 것도 거기엔 없었다. 나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그곳에서 나는 또 한번 내 쓸모에 대한 회의감과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내 앞에 주어진 어떤 일들도 정면으로 맞서며 나름의 재료들을 모두 붓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직장에 나의 필요란, 일절 없었다.
이벤트는 찰나고 일상은 계속되는 법이었다. 복직과 함께 내 희열과 기쁨은 워캉맘의 일상속으로 빠르게 잠식돼 사라졌고,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성취감과 보람을 찾지 못한채 전전긍긍, 좌불안석, 우왕좌왕하는 찌들고 못난 나만 있었다. 집에서는 직장생각, 직장에서는 집생각. 나에게 주어진 하루의 주인이 아니라, 하루에게 질질 끌려가는 노예같이 못난 내가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미 이사와 적응으로 인한 심한 피로감과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던 나는, 복직을 통해 탈출구를 찾고 그게 나를 찾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기대가 좌절되면서 거의 텅 비어버린 나를 마주했다. “너는 어떤 불꽃 앞에서 춤을 추는 인간이냐,“ 라는 질문은 그러니까 필연이었다. 내 딴에는 발버둥이었을 질문이었던 탓에 나는 반드시 해답을 찾고 대답을 해야했다. 그땐 내가 지났던 터널과, 여러가지 경우의 수들, 그리고 출산과 육아를 반복하며 시험을 치르고 출퇴근을 하던 나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해 정의내리고 분석하고 싶었다. 검고 깊던 우물이 왜 바쁘게 직장을 오가며 몸을 혹사시켜도 사라지지 않는지, 어쩌면 더 검고 더 깊어지기만 하는지, 어리석던 나는 그 답을 알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