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arden Oct 21. 2024

가만히 건네받은 위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7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의 네 몸을 감싸고 있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평론가 신형철이 예전 <느낌의 공동체>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예전에는 이 말을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낭만적이기만 한 글로 이해했는데, 나에게 이 구절을 다르게 읽게되는 시절이 찾아왔었다. 이사를 하고나서부터 조금씩 발이 빠지던 그곳이, 검고 깊은 늪 이라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 거기선 방향도 갈피도 잡을 수 없어 나는 그저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 점점 나를 잠식해가던 늪을 보고서도 단박에 떨쳐내지 못했던 이유는 거기가 깊고 검어서만은 아니었다. 아무도 내 기분과 내 상황에 공감해주지 못한다는, 외로움. 그래, 외로움 때문이었다. 아무리 얘기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우성.

“네가 왜?”

“다 마음먹기에 달린거야.”

“그거 자기연민이야.”

이 3종세트. 가깝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털어놓은 내 증상에 대한 제일 많이 들은 처방이었다. 그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아픔을 이런 식으로 외면하지는 않았을지, 미안했다. 그들의 느낌을 신형철이 얘기한대로 나는 하나도 '몰랐다' 아마 지금도, 훗날에도 모를 것이었다. 설명되지 않은 내 마음만이 거기에 있었다. 이 세상에 단 한사람만이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면 되는데, 그 단 한 사람이 없다는게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고, 누가 나를 떠밀지도 않았는데 나는 점점 더 늪 아래로 처박히고 있었다.


몸이 아프면 누구라도 환부를 확인할 수 있고, 그건 객관적으로도 관찰이 되기에 수치화, 지표화할 수 있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에게도 적절한 배려와 위로를 받는다.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는 걸 알게되었을 때 신형철 평론가의 얘기는 그것이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마음’ 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이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인간의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마음과 그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타인을 이해하는 데 불완전한가, 에 관한 얘기였다는 생각이 이제와서는 든다.


내가 깊은 늪에 침잠하던 시기,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나를 위로해준 것이 있었는데, 그게 이 드라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우리들의 블루스> 중에서도 선아와 동석이의 에피소드였다. 이 에피소드가 방영됐을 때, 평가가 그렇게 좋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저런 엄마가 어딨냐, 비현실적이다, 연기가 별로다 등등 여러가지 면에서 지적을 받았었다. 그렇지만 나는 드라마를 보는 내내 너무 슬펐고 그래서 충만했다. 선아는 부모님의 부재와 그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는데, 그게 계기가 되었을지 모를 우울증을 가진 채로 결혼을 하고 출산도 했지만 그걸 떨쳐내지 못해 끝내 이혼을 하고 만다. 동석이는 어려서부터 선아를 좋아했던 동네오빠로, 본인 역시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동석이만의 투박하고 거칠지만 따뜻한 방식으로 선아를 위로하고 어둠속에서 꺼내주려 노력한다.


 어떻게 보면 그렇고 그런 뻔하고 재미없는 러브스토리였을 이 에피소드에서 내가 주목한 부분은 선아의 우울함을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그동안 내가 봐왔던 드라마에서 우울증에 빠진 인물들은 대체로 우울을 뒤집어쓴 얼굴로 그저 ‘우울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겪은 우울증이란 그런게 전혀 아니었다. 드라마속 선아처럼,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일상에 질질 끌려가고 있는 것이고, 하루종일 오만상을 쓴 채 우울해서 못견디는 것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예고없이 찾아오는 검은 그림자에 나조차도 어찌해야할지 몰라 당황하고, 그러다가 도저히 물리쳐지지가 않아서 좌절하고 무기력해지는, 그런 상태였다. 그걸 선아가 마치 내 마음을 재연하듯 보여주었다. 그게 그렇게 나한테는 와닿더라.


어쩌면 동석이가 건네는 위로가 선아한테는 통했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전혀 먹히지 않는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이럴 수도 있구나, 저런 방식도 있는거구나, 그런 것도 가능하구나, 하며 무방비 상태로 거기 나오는 모든 대사와 장면을 온마음으로 이해하는 심정이 되었다. <우리들의 블루스> 는 그래서 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드라마다. 일단 설득당하면 게임끝이다. 개연성이 좀 떨어지는지, 배우들의 연기가 어땠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나는 여러가지 장르의 드라마나 영화를 모두 좋아하는데, 특히 같은 상황에서도 다양하게 풀어내고 반응하는 여러가지 인간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는 드라마를 가장 좋아한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영혼과 마음을 대신 느끼고 깊이 이해하게 된달까. <우리들의 블루스>가 딱 그런 드라마다. 인물위주로 전개되는 이 드라마에서는 등장하는 모두가 주인공인데, 그들에게 부여된 사연과 서사가 이해가 안될지라도 드라마의 플롯을 따라가다보면 절로 이해되고 설득당한다. 옥동과 동석 에피소드에서 옥동의 태도가 이해가 안된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나는 보는내내 저런 사람도 있겠다 싶었고 동석이옆에 그냥 있어주고싶은 마음이었다.


드라마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어루만져주는 느낌이었다. 지금 너는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 하면서 등을 쓸어내려주는 느낌. 때로는 말보다 그어떤 위로보다 더 큰 위안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내가 니 마음을 알아, 라는 무언의 신호. 그건 때로는 어느날의 석양일 수도 있고, 밤바다에서 만난 한줄기 바람이라든가, 갑자기 떠오르는 오래된 농담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일 수도 있다. 누구나 석양에게, 밤바다에게, 시답지않은 농담에 빚을 지게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나의 경우, 이번에는 이 드라마였다. 말없이 다가와 가만히 건네받은 위로로 난 한참을 따뜻하고 충분했다.


 “나는 사람이 다른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선 안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소설가 김연수가 <세계의끝, 여자친구> 에서 썼던 글이 머리속을 오래도록 떠돌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