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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Jan 22. 2023

올해의 서론은,

feat. 백수린

*

나는 썩 다짐을 잘하는 편이. 그런 사람에게 새해란,

지키지도 못할 숱한 다짐과 결심을 남발하고도

죄책감과 책임감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몇 안 되는 날이다.

매년 나는 그래왔고, 그 후로는 결심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늘 그렇듯 자알 지내왔지만, 올해는 그러지 못했다.

마흔살의 나에게 해줄 얘기도 떠오르지 않았고 올해 어떻게 살아보겠다는 결심도, 할 마음이 나질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았고 숨었고 무거운 팔다리를 하고 있었다.


*

나의 이런 마음과 정신이, 무거운 몸이 정확히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알지 못할 거란 사실만 안다. 나아지기 힘들 거란 사실만 명징할 뿐이다.


*

모르겠다. 누군가는 사춘기 때 끝냈어야 할 질문을 나는 끊임없이 지금 나에게 하고 있다. 너는 잘 살고 있느냐,

너는 무엇을 하면 행복한 사람이냐, 너의 인생은 무엇 앞에서 춤을 추느냐, 를 다시 움직이게 기름칠을 할 무엇은 과연 무엇이냐. 내가 마흔둘의 나로 현실에 '아직은' 발을 붙일 수 있는 게 어쩌면 영원히 대답을 찾지 못할 질문 앞에서

그래도 답을 찾아보는 게, 여정 그 자체로 의미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다.


*

반짝이는 책들이 그 희망 중 하나가 된다. 장편은 잘 읽지 못할 만큼 집중력이 떨어진 지금의 내 모습이지만 백수린 작가는 작년 한 해 나의 집 뒤 동산과도 같았다. 험준하고 깎아지른 수려한 모습의 산맥도 멋지지만 언제고 나에게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걸어주는 것은 근린공원과 다를 바 없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던 것 같다. 수많은 작가가 멋진 글과 이야기를 쓰고, 화면보다 더 촘촘하고 긴장되게 만드는 숨 막히는 서사를 쓰지만 나에게는 슬픔이 둑처럼 터져 나올 때마다 달려가 울음을 터뜨릴 수 있고 무기력이 나를 잠식하려들 때 언제든 주저 없이 올라가 쉬었다 내려올 수 있는 백수린 작가가 <다정한 매일매일>과 같은 위로이자 휴식이었다. 백수린 작가에게서 책이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

서툰 민화를 배워봤었다. 그림이란, 언제나 내가 정복하지 못한, 아니 감히 다가가지도 못했던 DMZ의 영역이었다. 왜일지 몰라도 라떼는 다 그랬었다. 여자아이들은 피아노를 남자아이들은 바둑이나 태권도를 배우던, 더없는 몰개성  취미의 시기.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지만 한 번도 이루질 못했고 그저 타인의 영역이었던 그것. 버킷리스트에 언제나 1순위로 올라가 있지만 무언가를 결정할 때는 가장 후순위로 밀려났던 그것. 일주일에 1회 3시간씩을 그렸는데, 정말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들이었던 걸로 기억에 남는다. 복직을 해서 그만두어야 했을 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던 것이 이 그림 그리는 시간이었을 만큼, 나에게는 팔다리의 가장 가느다란 혈관 끝까지 온전히 피를 돌게 해 주던 조용하지만 힘이 센 힐링이 민화였다. 꼭 다시 배우리라.



*

지난 한 해를 요약하자면 낭만은 멀지만 일상은 가까운,, 그런 날들이었고 힘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작년 초에도 제작년은 힘들었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작년의 기억은 모두 다 날려버리고 새로 태어나는 것!!

그런 게 아니라 작년의 기억을 조용히 덮거나 껴안은 채로

그 위로 켜켜이 새로운 고통들과 무게들을 얹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무덤덤히 하루하루 헤쳐가겠다. 무엇을 하기보다는 하지 않아도 됨 역시 누릴줄 알 거기에 감사하겠다. 무엇을 해야 한다면 일희일비하지 않고 조용히 무게를 견디겠다.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고 살아지는 것이므로 그저 스며들어 조용히 하루하루 나아가고 싶다.


*

그리고 지금도 늦은 게 아니라면

마흔두 살의 나에게 이제 와서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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