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읽기 모임(25.9.4)을 마치고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
설익은 어둠이 짙어지는 시간, 그림책 도서관 건물 뒤로 초록 풀들이 좌우로 정렬해 있는 느슨한 오르막길이 닦여있습니다. 그 길은 오솔길보다는 조금 넓습니다. 이 길을 오르면 서너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작은 방갈로가 있는데, 가운데 테이블 하나를 두고 의자를 몇 개 두르면 오붓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어제저녁 글 읽기 모임이 있어 근처 도서관에 들렀습니다. 벤치로 나갔으면 했는데 아직 습한 기운이 있어 우선 실내 세미나실을 빌렸습니다. 두 시간을 꽉 채워 이야기했습니다. 글 읽기 자료 옆에는 옥수수 두 개와 물 한 병, 그리고 나중에 알았는데 키위와 복숭아 도시락도 있었습니다. 한참 이야기하다 보니 간식을 지나쳐버렸습니다. 그래서 도서관 뒤 언덕으로 올라가 과일간식을 먹기로 하고 길을 올랐습니다. 신선한 밤하늘 아래 이런저런 이야기로 모임을 마무리했습니다.
여름내 숨죽였던 귀뚜라미가 어느새 목소리를 다듬고 밤 언덕에 늘어서 있는 것 같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울려주는 팡파르가 밤하늘과 묘하게 조화롭습니다. 문득, 귀뚜라미의 가을밤 울음소리는 한 단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솔추야애가(蟋蟀秋夜哀歌)' 구애하거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한 생존의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울음’으로 들어주었던 누군가의 마음이 애틋한 이 계절과 닮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걷다 보니 이 소리는 지난여름에 묶였던 마음의 해단식 축하 연주 같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을은 해체의 계절입니다.
이 해체의 시절에는 몸의 긴장이 풀어지고, 나뭇잎은 낮은 곳에 눕고, 열매는 씨앗을 잉태한 뒤 스러집니다. 해체는 스러짐과 살아남의 역동입니다. 이 가을은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절묘한 생존의 시공간입니다. 어느 시의 가사로 만들어진 노래, 어느 가을 낙엽 시, 그리고 프랭크 게리의 스타타 센터의 건물에서 가을이 ‘풀어져 버린’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해체는 스러짐과 살아남의 역동입니다. 이 가을은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절묘한 생존의 시공간입니다.
가을 해체의 흔적들
록밴드 YB의 노래, '가을 우체국 앞에서', 안도현 시인의 '가을 낙엽', 그리고 광화문 어느 빌딩에 내걸린 현판의 문구는 모두 해체의 계절에 제 몸을 닿게 하는 전령들입니다.
운전하고 외곽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길에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흐릅니다. 이 노래는 적어도 저에게는 여름이 끝났다는 최초의 전령입니다. 록을 즐기는 밴드가 이런 서정적인 노래를 불러주었다는 것에 늘 감사한 심정입니다. 이 노래는 가수 윤도현 씨가 데뷔 후 활동했던 '종이연' 밴드가 불렀지만, 결국 그의 곡으로 남았습니다.
저는 이 노래의 압권이 마지막 가사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라고 늘 생각합니다. 사람을 기다리며, 자기 주위의 모든 것들이 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끝내 보낼 편지도 없는데 우두커니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자신을 '잊어버린' 모습은 영락없는 가을의 해체를 그려냅니다. 저는 이 노래에서 해체란 '잊어버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기억은 불완전하여 사라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계절은 해체의 관점에서 잊어야 할 것을 잊어버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야 그 틈에 새로운 기억이 살아날 수 있다고 일러줍니다.
또한, 시인 안도현의 「가을 엽서」(『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에서도 이 해체를 운명처럼 받아들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부분 발췌>
이 시에 따르면,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것은 ‘가진 것이 많아서’이고, 그마저 없어도 그저 ‘낮은 곳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모든 해체는 중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물처럼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해체는 ‘낮은 곳으로 이행’입니다.
여름 내내 간직했던 숱한 삶의 무게가 이 추풍에 천천히 흩어지면, 그제야 나뭇잎은 제 삶이 끝났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발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그리 두렵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힘겨운 지난 계절을 버텨내고 맞이하는 궁극의 존재 이유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나눠주는 그대가 버틸 힘을 주겠다는 생존의 시그널이라 해야겠습니다. 마침내 그 ‘버팀’이 행복하게 끝났을 때, 안도하며 돌아갈 숨터라고도 해야겠습니다. 나뭇잎은 떨어지면서도 행복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해체가 생사의 순환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사랑의 결실이라는 신의 섭리에 순응하는 미미한 거사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느 날 우연히 프랑크 게리의 해체주의 건물 ‘스타타 센터’를 사진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안에 있다는 이 건물은 “언제나 미완성된 것처럼 보일 겁니다. 마치 무너질 것처럼 보인다.”는 어느 비평가의 말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나에게는 레고들의 ‘무너짐 그러나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는’ 그런 이미지가 선명합니다. 옛 방사선 연구소가 허물어지고, 그 위에 세워진 이 건물은 ‘해체’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앙증한 가을 단풍을 앞에 세워둔 사진 속 풍경을 보면 그 스러짐과 세워짐이 어색하면서도 조화롭습니다.
<스타타 센터 2004년 개관, 보스턴 글로브의 건축 칼럼니스트 로버트 캠벨의 말 2004년 4월 25일 출처. 위키피디아>
건축가 자신은 이 건물이 ‘흥에 겨운 로봇들의 축제’라고 말했다지만, 나는 갈색 건물에서 어쩐지 그 축제가 끝나고 돌아가는 파장 분위기의 아쉬움이 더 짙게 배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 짙은 노란 건물에서 다음 향연이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도 함께 묻어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가을에 보게 된 이 건물 사진에서 나는 무너지다 만 듯한 모습에 마치 떨어지려는 나뭇잎이 마지막까지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미련을 느낍니다. 그 불안한 미완성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씨앗처럼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모습이 겹쳐진다는 해석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나에게 이 건물은 가을의 해체가 ‘떠남’과 ‘돌아옴’이라는 어떤 영웅의 서사를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해체는 재해석의 길
해체는 슬프고 절망할만한 일입니다. 가루만 남기고 없어지는 일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웃을 수 있는 희망이라 할만합니다. 먼지가 뭉쳐 새로운 노래, 나뭇잎, 건물로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체는 삶의 질서에서 필연적입니다. 나에게 강제로 부과된 질서 안에서 나의 고유한 질서를 창출하는 인간다움이 자연스럽게 살아나는 과정입니다. 계절의 속성은 해체가 없이는 생성하기 어렵습니다. 가을이 없어지면 봄은 낯설 것입니다. 해체는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없어져 새롭게 ‘살아지는’ 신비한 질서입니다. 그런 점에서 해체는 ‘재해석’입니다. 내가 나를, 내가 너를, 내가 이 세계를, 내가 나의 ‘앎’을, ‘믿음’을 새롭게 해석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내가 모임 시작 전보다 내 안에서 좀 더 미세하게 해체된 것들을 느낍니다. 도로 옆, 한두 마리의 귀뚜라미의 울음이 조금 전 도서관에서 들었던 그 울음보다 더 짙은 환희의 노래로 들리고, 숲의 나무보다 거리의 나무가 더 빨리 물들어 어느새 겨울과 맞부딪칠 전의를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 귀뚜라미의 울음을 ‘생존의 소리’만이 아니라 ‘생을 향유하는’ 소리처럼 내 안에서 재생하고 있습니다.
해체는 새로운 해석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겨울이 지나면 새싹이 나듯, 해체의 흔적은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선선한 가을밤이 무르익는 사이,
나의 여름마저
행복하게 풀어져 천천히
가을로 들어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