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를 산–산 아래서 산 위를 상상하는 즐거움

by 푸른킴

산 위에서 내려다본 산 아랫마을

해가 떠오르던 어느 가을 아침, 지리산 노고단을 올랐다. 삼성재 휴게소까지 차로 올라간 뒤, 그리 멀지 않은 길을 걸었기에 산책하듯 가벼운 기분이었다. 길 중간쯤에 있는 전망대에 이르자, 구례를 휘감아 흐르는 섬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마침 내가 도착했을 즈음, 마을을 덮고 있던 구름바다가 막 걷히고 있었다. 구름에 손바닥만 한 틈이 생기자, 그 틈으로 구름이 순식간에 마을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마침내 구름 아래 웅크리고 있던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 있었지만, 손에 잡힐 듯 청명했다. 짧은 산행을 마치고 다시 그곳에 섰을 때, 마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산 너머 저쪽

구름이 걷히자, 이번에는 산들이 마을을 품듯 감싸고 있었다. 어젯저녁, 해가 마지막으로 사라져 가던 바로 그 산줄기들이다. 그 무렵, 산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 문득, 그 너머에는 어떤 마을이 있을까,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궁금해졌다.


앞산이 마을을 두르고 어둠 속으로 데려갈 때, 뒷산 너머의 마을에는 아직 빛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산은 경계였다.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흐릿한 선이었고, 그렇게 이어진 산맥은 마을에서 한숨 돌리듯 몸을 낮췄다가 다시 남쪽과 동쪽으로 줄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바람이 실어온 작은 상상

짧은 산행을 기분 좋게 마쳤다. 내려오는 길에, 올라갈 때 머물렀던 그 전망대에서 다시 걸음을 멈췄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여전히 맑았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노릇하게 익어가는 논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은 한층 더 호젓하게 느껴졌다.


웅덩이처럼 움푹한 마을로 햇살이 부드럽게 쏟아지고 있었다. 바람은 시원했고, 햇살 아래 가만히 있으면 따뜻하기도 했다. 마을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그 옛날 이 산 위에도 오늘처럼 바람과 햇살이 휘돌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르티잔’과 토벌대. 이 산줄기와 저 계곡을 따라 쫓고 쫓기며 내달렸던 그 시절 사람들도, 이 능선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저 마을을 내려다보았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뛰어다니다, 어느 계곡 한편에 숨을 죽인 채 멈춰 서서, 저 아래 마을을 바라보며 문득 향수에 젖었을까? 금도 이렇게 스산한 가을인데, 하물며 한겨울, 눈 덮인 산길을, 땀에 젖은 몸으로 달릴 때 냉기는 또 어땠을까. 그때도 이 바람과 햇살이 그들을 잠시나마 따뜻하게 해 주었으면 좋았겠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가을’을 떠올릴 수 있게, 잠시라도.


지리산을 추억한 사람들 따라

가을 지리산은 부드럽고 화사하다. 그리고 흐릿하고 차갑다. 계곡으로 내려서든, 봉우리로 오르든, 한낮에도 바람은 차갑다가 따뜻해지기를 반복하며 뒤엉킨다. 가만히 있으면 으스스하지만, 걸으면 금세 온기가 도는 신비한 길들이 곳곳으로 뻗어 있다. 그 길을 따라 오르는 사람, 내려오는 사람들, 눈웃음으로 조용히 안녕을 건넨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기약 없는 스침일 뿐이지만, 이 길 위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우리 일행은 산을 완전히 내려가기 전, 햇살 따뜻한 자리를 찾아 잠시 앉았다. 누군가 자연스럽게 지리산에 관한 몇 가지 상식 같은 이야기를 꺼냈고, 자연스럽게 퀴즈로 이어졌다. 그중 누군가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언급하자, 기다릴 것도 없이 누군가 이병주 님의 『지리산』을 외쳤다. 이어서 조정래 님의 『태백산맥』도 나왔다.


“지리산이 소백산맥의 끝자락이니, 『태백산맥』이란 제목도 의미심장한 거죠.” 누군가 덧붙였다.


퀴즈 놀이는 안치환의 노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원규의 시)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바람 부는 햇살 아래 옹기종기 앉아 산 아랫마을을 내려다보며 노래를 들었다. 노래 속에서 산은 다가왔다가 멀어지곤 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모두 조용히 말을 멈추었다.


산 아래에서 내려다보는 물 위의 산

산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나는 한강에 남겨진 섬, 선유도를 다시 걸었다. 잘 다듬어진 작고 올망졸망한 길들이 매력적이었다. 한때 이 섬엔 사람이 들어오지 못했다. 오래전 거칠고 탁한 물을 정수하던 고립된 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공간이 되었다. 어느 날부터 길이 생겼고, 갈수록 걷기 좋게 다듬어졌다. 폐시설이 되어버린 곳에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었다. 곳곳에 초록 나무들이 무성하고, 희귀하게 꽃을 틔웠다는 대나무도 잘 자랐다. 초록 잔디 공원에는 파릇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경쾌하다. 천천히 길을 걷다 벤치에 앉아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건너편에서 바람에 출렁이는 버드나무도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엊그제 지리산 위에서 내려다보던 마을이 물 위에 비쳐 보였다.

하늘 저편의 구름도, 그 마을을 감싸고 있던 것처럼 낯익었다.

산 아래에서 산 위를 바라보던 기억이 다시 슬그머니 떠오른다.

그때의 산뜻했던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바람이 강 너머로 불어갔다.

그때 구름이 나를 보고 아는 척 묻는 듯했다.


“그 산에, 언제 다시 올 건가요?”


나는 대답 대신 미소 지었다.

곧 가겠다는 뜻이었다.

이번 가을에도, 물들어가는 산 하나쯤,

높이 올라 산 아랫마을을 다시 내려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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