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작시에 대한 AI의 총평(1)

안식월 후 나의 삶 詩 1-13편에 대한 AI평론

by 푸른킴

광야와 정원 사이―「안식월 후 나의 삶」의 시적 여정

저는 공인된 시인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시를 씁니다. 전문 시인이라면 시를 쓰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곧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저는 ‘시답지 않은 시’를 남기는 것일까요? 바로 그 이유를 다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안식월을 보낸 뒤에도 제 안에는 사유의 여진이 계속되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긴 산문으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래전부터 습작만 하던 시 쓰기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로 했습니다. 시를 남김으로써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SNS에 공개한 시들은 단순한 작업의 결과물입니다. 새벽에 떠오른 단어나 문장, 이미지를 붙잡아 90분 이내에 완결하는 방식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초고가 완성된 뒤에는 무한히 퇴고를 거듭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시는 퇴고의 산물이어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시에 대한 예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처음 쓸 때 각 시는 독립된 알짬을 지녔습니다. 서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AI에게 총평을 물었더니, 제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줄기를 찾아 정리해 주었습니다.

당연히 AI의 글은 정갈합니다. 그러나 그런 글은 제 시의 내적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제 삶은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AI는 이미 난 길을 걸으며 정리를 잘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없는 길, 이해할 수 없는 길로도 끝없이 뻗어가려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시도 한꺼번에 쓰거나 읽어낼 수 없습니다. 한 편씩, 마치 한 걸음씩만 겨우 걷는 것처럼만 읽을 수 있을 뿐입니다. 둘째, 누구도 타인의 시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AI는 읽자마자 답하지만, 인간은 읽고도 읽지 않을 수 있고, 답하지 않아도 이미 답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평범한 사실 때문에 저는 모든 사람이 그 자체로 시인이라고 믿습니다. 몸짓, 말, 글 중 시가 아닌 것은 없습니다. 함축과 행간, 생략과 비약이 삶 전체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기 시를 자신이 해석하려 애쓰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그 시를 대신 읽어낼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시를 쓰면서 제 삶에 한 가지 다짐을 더했습니다. 내 시의 최종 독자가 야훼가 되기 전에, 내가 나의 시를 끝없이 퇴고하고 또 퇴고하겠다는 것입니다. 제 삶은 이제 겨우 둘째 연을 쓰는 것 같습니다. 서너 연은 더 써야 할 텐데, 사유의 깊이가 아직 얕아 더 힘을 내야겠습니다.


아래 글은 이번 시들을 연작으로 이해한 AI가 정리한 평론입니다.

전문을 한 두어 글자만 고쳐 옮겨둡니다. 오늘날 기계들은 인간의 무능을 빠른 속도로 드러내며, 사유하지 않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유로 이 시대를 기계와 함께 살아내야 할까요?




Q. 안식월 후 나의 삶 시 1-13편 연작시의 평론부탁해

A. ChatGPT의 말: 38s 동안 생각함


총론: 광야에서 정원으로, 모름에서 사랑으로

이 연작은 ‘안식월’ 이후의 삶을 시간·언어·신체의 감응 속에서 더듬어 가며, 최종적으로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랑”으로 귀결되는 서정을 구축한다. 초반(1–4편)은 일상과 신체의 변화에 응답하는 감각의 세팅, 중반(5–9편)은 글의 탄생과 이웃성을 탐색하는 서사, 후반(10–13편)은 의례·수정·수확·고백으로 상승하는 수행의 시간을 보여준다. 이 여정은 마지막 13편의 선언—“숨 쉬게 하는 사랑,/그 쓴 /글을ㅡ”으로 봉합되되, 마침표 대신 여백(‘ㅡ’)을 남겨 열린 수행으로 남는다.


「안식월 후 나의 삶」은 안식월 이후의 시적 시간을 ‘쉼 이후’라는 틀에서 자기 삶을 기록한 열세 편의 연작시다. 이 연작은 일상과 시간, 신체와 언어, 타자와 사랑을 다양한 장면으로 배치하며, 모름–앎–사랑–글쓰기라는 주제적 궤적을 형성한다. 그 여정은 1편의 “사랑연체인간”에서 시작해 13편의 “그를 사랑”으로 닿는다. 곧 이 연작은 광야의 경험을 거쳐 글쓰기라는 수행으로 나아가는 서정적·철학적 기록이다


안식월 후 나의 삶 詩 1-13편의 구성:구성의 결: 세 막(三幕)으로 읽기

I 막 (1–4편): 삶·말·비·세월—감응의 자리 세우기, 삶의 자리를 정돈하다

초기 시편들은 삶의 구체적 조건과 신체적 경험을 점검한다.

1편은 “대출/연체/해제”의 삼항을 통해 빚/유예/해방의 윤리를 일상의 언어로 끌어온다. “연체동물, 인간”이라는 촌철은 사랑의 부채를 끝내 완제하지 못하는 인간 조건을 유머와 자책 사이에 놓는다.

2편은 말의 두 생애—“윤슬처럼” 빛나는 말과 “폐물처럼” 남는 말—을 대조하며, 듣기/품기를 자기 길로 삼는다(“그 열매는 / 경청과 포용”). 헤밍웨이를 호출해 “절망/포기 너머의 희망/도전”과 “도전/희망 너머의 좌절/후회”를 교차시키는 상호텍스트가 인상적이다.

3편과 7편은 비와 새벽, 정원을 배치해 “오늘 같은 마음?”이라 묻는 기상(氣象)의 윤리를 세운다. 새벽은 어둠을 ‘먹어’ 더 새로워지고, 정원은 “가지런한 나의 아침”으로 정돈된다.

4편은 “늙어가는 내 몸의 외국어”를 환영하며, 낯설어진 신체를 야누스의 미소로 끌어안는다. 수용의 미학이 연작의 정조로 자리한다.

II 막 (5–9편): 꿈·도서관·가시·방문—글의 탄생과 공동체성

중반부는 언어와 글쓰기, 타자와의 관계, 이웃성을 탐색한다.

5편은 “너는 죽지 않는다 / 다만, 사라질 뿐”으로 꿈/시의 지속과 은닉을 한 줄 평로 견인한다.

6편의 도서관 폐쇄 안내문은 “친절을 가장한 저 안내문”으로 변주되어 배제의 텍스트가 된다. 그러나 시인은 로티의 『우연·아이러니·연대』를 “내 몸으로 새롭게 만난 즐거움”이라 뒤집는다. 접근 불가가 몸의 독서로 환골된다.

7편 「시간 정돈」과 8편 「가시 영양」은 각각 아침 정원의 정갈함, 몸에 걸린 가시의 은혜를 통해 시간과 고통의 수용을 노래한다. 특히 8편은 “가시도 은혜”라는 어머니의 옛말을 되살려, 언어의 과식이 남긴 통증을 영양으로 전환한다. 고통은 근섬유처럼 강화되고, 위로의 문장 “지금도 / 괜찮다”가 눅잖다.

9편은 출산/세례의 장치를 언어에게 이식한다. “금줄(금줄詩?)”의 언어놀이, 이웃의 “좋아요 손끝”은 텍스트를 공동체적 환대의 장으로 만든다. “한 글 자라는 건 / 이웃 한 말로도 / 충분”하다는 진술은 이 연작이 지향하는 공생적 문식성을 웅변한다.

III 막 (10–13편): 의례·수정·수확·고백—수행의 시간

후반부는 글쓰기를 의례와 수행의 차원으로 끌어 올린다.

10편의 추모 새벽은 “구월삼일이라 쓰고/句越參一이라 읽는다”는 문자놀이로 언어-의례의 문을 연다. “그 아홉 언어 / 한 끼의 양식”은 시인이 사는 법, 곧 언어의 성만찬이다.

11편은 “수정 만용”을 반성하고 Ad Fontes로 돌아간다. “완벽 한 걸음 앞/돌아서는/수정용기/ … 미완하는 여백/해방/탈고.”—연작의 미학적 윤리(미완의 용기)가 명문으로 박힌다.

12편은 계절의 수확을 넘어 “성소”와 “광야”를 포개며, **어떤 완성보다 ‘사람다움’**을 묻는다. 후기의 “다시 열사의 땅이라도 / 함께 걸어가고 싶네”는 공동-순례의 약속이다.

13편은 총합이다. “오늘도/모른 채로” “어둠이 흘러나간/거기서” 시인은 마침내 “사랑한다는 것을/끝내/ 알았다”고 고백한다. 이어지는 “어둠의 성자/숨 쉬게 하는 사랑,/그 쓴/글을ㅡ”은 부정신학적(‘모름의 지식’) 수행을 호흡의 사랑과 쓰기로 일치시킨다. 연작의 종지이자 다음 편을 여는 쉼표다.


핵심 주제와 장치

모름/앎의 역설 → 사랑

이 연작은 ‘완전한 앎’을 거부하고 “모른다는 것을 아는”데서 사랑을 성립시킨다. 이는 13편에서 정식화되고(“모른 채로”의 반복), 2·11편의 경청/미완 윤리로 예비된다. 앎의 소유가 아니라 모름의 동행—이것이 이 시집이 말하는 사랑의 정의다.

시간의 윤리: 새벽·비·가을

새벽(3·10편), 비(3편), 가을(12편)은 시간을 살아내는 감각-규범으로 작동한다. “정원”으로 표상되는 내부 질서(7편)는 “광야”의 외부성(12편)과 긴장하며, 시인은 두 시간을 왕복한다. 광야↔정원의 왕복이 곧 글쓰기다.

말-듣기와 공동체 문식성

2편의 “경청과 포용”, 9편의 “옆집 좋아요 손끝”, 6편의 차가운 안내문을 몸으로 전유하는 장면은 텍스트가 관계의 기술임을 가르친다. 시는 독백이 아니라 호흡과 응답으로 자란다.

의례와 언어놀이

10편의 “句越參一”, 9편의 ‘금줄/금줄詩’ 풍경, 11편의 Ad Fontes는 문자·전승·개혁을 가볍게 넘나든다. 의례화는 무겁지 않고, 놀이성은 얕지 않다—가벼운 근엄의 미학.

미학적 특징

단속 호흡·절제된 행 길이: 짧은 행과 행갈이가 망설임→확신의 리듬을 만든다(13편 결말의 여백 표지 ‘ㅡ’ 포함).

반복·역설의 문장술: 2·13편의 반복-전환은 사유의 과정을 형식으로 체화한다.

공간의 상징망: 광야–정원–성소–도서관–이웃집(9편)의 연쇄가 고독과 환대의 벡터를 구성한다.

모름과 앎의 역설: 연작은 ‘앎의 소유’를 거부하고, ‘모른다는 것을 아는’ 태도 속에서 사랑과 글쓰기를 정의한다.

광야와 정원: 외부의 황량함(광야)과 내부의 정갈함(정원)이 긴장하며, 시인은 이 왕복 속에서 글을 쓴다.

공동체적 언어: 글은 혼자의 것이 아니라 이웃의 말, 손끝, 축하 속에서 자란다.

수행으로서의 글쓰기: 최종적으로 글쓰기는 호흡과 사랑, 성자의 길로 제시된다.


비평적 제언(텍스트 편집 차원)

표기 정돈: 일부 부호/오탈자(예: “걷고 오르고, ,”, 인용부호, 고유명(로티) 표기, ‘금출시’의 의도 등)를 시집 본문 편집에서 통일하면 완성도가 올라간다.

모티프 색인: ‘광야/정원/성소/금줄/가시/새벽’ 등 핵심 모티프의 색인을 덧붙이면 연작 독해의 길잡이가 된다.

중편(6–9)의 연결 문맥: 6편(배제의 표지)→9편(공동체 환대)로의 전환을 한 줄 코멘트/작은 연(聯)로 다리 놓으면 흐름이 더 선명하다.


결론

「안식월 후 나의 삶」 연작시는 단순한 자기 기록이 아니다. 이는 광야에서 정원으로, 질문에서 고백으로 이어지는 영적·철학적 여정이다.

1–4편은 조건을 점검하고,

5–9편은 글의 탄생과 공동체를 확인하며,

10–13편은 의례와 수행으로 고양된다.

마지막 13편은 열린 여백(‘ㅡ’)으로 끝나며, 연작을 완결짓는 동시에 끝나지 않는 글쓰기의 삶을 선언한다.

따라서 이 연작은 “모름을 아는 사랑”으로서의 글쓰기라는 하나의 시론을 제시하며, 현대 시가 나아갈 새로운 윤리적·존재론적 방향을 제안한다. 또한, 이 연작은 사유의 문장을 살이 된 호흡으로 바꾸는, 드문 성취를 보여준다. 1–9편의 감응과 공동체성은 10–13편의 의례·수정·수확·고백으로 상승하며, 최종적으로 “어둠의 성자”라는 도상(圖像) 아래 모름의 사랑을 쓰기의 수행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이 시들은 닫히지 않는 탈고이며, 끝없이 숨 쉬는 사랑의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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