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소나무, 오랜 기도의 길

by 푸른킴

오래된 소나무의 속을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지난 겨울 거친 폭설 끝에 숲으로 들어가는 산책로 곁길에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연이어 쓰러졌습니다. 서 있을 때는 몰랐습니다. 건장하게 땅을 지탱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무거운 눈덩이에 줄기가 견디지 못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렸습니다. 큰 몸집에 비해 얕은 뿌리로 겉흙만 살짝 덮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오늘 산책길에서 그 나무들을 다시 보았습니다. 우연히 잘린 채로 깔끔히 치워져 있는 그 나무 속을 볼 수 있었습니다. 쓰러진 나무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이테의 중심부였습니다. 특히 결이 어긋난 자리에 꽃잎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오래 버틴 시간, 지루한 고통이 고스란히 각인된 흔적이라 할 만했습니다. 아니 나무의 오랜 상처가 결국 꽃의 무늬로 바뀌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지루한 인내는 끝내 화려하게 영글었습니다. 그 흔적은 단번에 새겨진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버티고 또 버텨, 나뭇골 사이에 스며들고 굳어져 새겨진 것입니다. 나는 그 무늬 앞에서 기도하듯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그 나이테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삶에는 꺾이지 않는 심지가 필요해”


의아했지만, 이내 나도 공감했습니다.

지난 세월, 포기하고 싶었던 꿈, 주저앉았던 현실,

별것 아니어도 함께 무너지고 싶었던 타인의 아픔을 숱하게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계곡 같은 길에서 나를 지탱한 것이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견디는 몸, 곧게 서 있는 마음, 그것이었습니다. 오랜 기다림, 바람에도 곧게 자기를 버텨내는 심지가 나를 살린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알듯이, 그런 심지는 하루아침에 인간의 의지로만 세워지지 않습니다.

나의 심지는 꺼져가는 불씨를 붙잡아 다시 빛을 지켜내는, 꺾이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땅과 하늘로 시선을 바꾸며 마치 기도하듯 감상에 젖었습니다.

그 나무 앞에서 문득 떠오른 시가 있었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기도는 나의 힘」 마지막 연입니다.


이 지상에 의지할 데 하나 없어 하늘밖에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오직 기도밖에 없는 자의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기도는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니.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떤 울림이 일어난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 기도문에 쓰인 ‘기도’는 단순히 주문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말을 공중에 흩어버리는 무의미한 언어를 뜻하지도 않습니다. 하늘로 내던져버리는 빈 말도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이 기도문을 이렇게 고쳐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지상에 의지할 것 많아도
스스로 하늘밖에 없다 하고,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오직 기도밖에 없다고 받아들인 자의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기도는
땅 위에서 꽃피우리니.


그렇습니다. 기도는 인내가 말의 형식을 입은, 내 숨의 소리입니다. 하늘을 향하지만 끝내 땅에 뿌리내리는 말, 땅 위에서 버텨 사는 나를 하늘 앞에 기억하게 하는 탄식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기도는 인내의 가장 깊은 상징입니다.”

이 인내는 향기처럼 하늘로 오르되, 곧 낮은 곳을 향해 되돌아와 은총의 씨앗으로 심어집니다. 사라지는 듯 보일지라도, 바로 그 낮아짐으로 결실하는 선물입니다. 다음 기도를 준비하는 심지입니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압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기도 있으면 모든 것 가진 것이고,

모든 것 가져도 기도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나이테가 오랜 세월을 인내한 나무의 꽃이며,

기도가 긴 고통의 세월을 참아낸 인간의 상징이라면,

걷기는 오래 참는 나의 꽃이며, 상징입니다.

몸이 기진할 만큼 길고 멀리 걸을 때

비로소 세계의 속살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쓰러진 소나무 앞에서, 기도의 언어를 가슴에 새기면서

나는,

이 땅 위에 살지만, 하늘의 뜻에 사로잡히기를 여전히 바랍니다.

내 발자국 하나가 기도의 문장이 되고,

내 걸음 하나가 하늘과 땅을 잇는 대화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에게 걷기는 걷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형식이며, 내용입니다.

기도는 걷는 내가 오래 걸을수록 높아지는 산소포화도 같습니다.

인내라는 뿌리에서 솟아나는 활력입니다.


그래서 나는 믿으려 합니다.

기도로 사는 한, 쓰러진 자리에서도 꽃은 피어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꽃은, 땅 위에서 동시에 하늘에서도 열린다는 것을 말입니다.

길을 가다 혹시 오래된 소나무를 만나게 되면, 그 나이테를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조금만 기다리면

여린 나를 지탱해주는 기도의 힘이 지친 나를 가볍게 토닥여줄 것입니다. 그 손길을 타고 오래된 히브리 예언자의 고백이 바람처럼 내 앞에 머물 것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이사야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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