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비판적 사유의 필요성- 시인간을 추구하며

-참고. 황규관, “시의 윤리와 아름다움의 척도,” 「청색종이」 5(20

by 푸른킴

가벼운 수다

어느 날 한 모임에 참여했다. 나와 두 사람은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마친 뒤 딸기와 천혜향을 곁들인 후식을 즐겼다. 이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 주제 없이도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정해지지 않은 대화가 오히려 우리의 진심일 때가 많지 않은가.


그때 한 사람이 말했다. “날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불안하다.” 불안과 분노, 다시 불안으로 이어진 심정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이야기를 듣던 우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뚜렷한 해답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기에 더욱 속상하다는 말이 덧붙여졌다.

사실, 우리의 첫 질문은 분명했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쏟아지는 말들, 매일 출판되는 책들, 틈만 나면 다뤄지는 수많은 인문학적 주제들 아래서 우리 시대는 얼마나 정의롭고, 또 유쾌하게 유지되는가?’ 답은 분명했다. “아직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향해 다시 물었다. “이 이해 불가한 시대, 혼란의 세대에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이 침울하고 기대가 꺾이는 질문에 나는 조용히 스스로 답했다. “아니다. 나는 더 넓게 공부해야 한다. 나의 무지를 더 깊이 일깨워야 한다. 그것이 나의 과제다.” 그렇게 이 불안과 무력감은 곧 글쓰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가벼운 수다, 시인의 답

그 저녁 식탁에서 우리는 힘겨운 심정으로 대화했다. 그러나 시인의 책무를 떠올리면서 비로소 하나의 답을 찾은 듯했다. 시인의 분투는 이 세계의 모든 이가 자기 삶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일깨운다. 시인들은 이 땅의 사람들이 전쟁과 분쟁, 경제적 기울어짐 속에서도 여기까지 왔음을 문학으로 증명해 왔다.

비록 답은 없어 보이고, 갈라짐은 더 심각해 보이며, 마치 길을 잃은 듯하지만 좌절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길이 아닌 것들을 좇느라 오히려 용기를 잃고 있는지 모른다. ‘의’와 ‘공의’라는 단어가 맥없이 밀려나는 것은 그 언어의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시인들이 일러주듯,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언어의 속살로부터 자기 삶에 용기와 의지를 더욱 단호하게 새겨야 하지 않을까.


시인에게 배우는 비판과 상상

우리의 대화는 다행히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갔다. 물론 그 대안마저도 절규에 가깝지만, 포기하지도, 희망을 내려놓지도 않으려 했다. 공의의 주창자가 침묵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는 대안 아닌 대안도 마음에 담았다.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결연한 의지도 다시금 일깨워졌다. 그렇다.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 몸을 움직여 답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 탐구의 방법 중 하나로 우리는 ‘시학(詩學)의 과제’에 기대어 보았다. 그렇게 함께 찾아낸 한 답은 ‘비판과 상상’이었다.


비판은 드러난 문제를 냉정히 바라보고 자기 사유로 해체하는 것이다. 문제의 기원을 더듬으며 그 속살을 살피는 탐구다. 따라서 질문은 필수적이다.

상상이란 보이지 않는 문제를 주목하는 것이다. 볼 수 없게 위장된 것을 꿰뚫어 보고, 감춰진 시대의 내적 흐름을 공부한다. 상상력은 공부 없이는 자라지 않는다. 이 상상은 그저 꿈에 머물지 않는다. ‘오고 있는’ 현실 그 자체다.


요컨대 비판은 현실을 해체하는 질문이며,
상상은 감춰진 세계를 공부로 길어 올리는 혜안이다.


가벼운 논설 한편

모임을 마치고 돌아와 늦은 저녁, 하루에 한 편씩 읽는 논문으로 황규관의 글을 집어 들었다. 제목은 「시의 윤리와 아름다움의 척도」였다. 이 글은 “시가 이렇게 많이 쏟아지는데 우리 삶은 더 풍요로워졌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의 글은 네 가지 주장으로 요약된다.

시의 풍요에 대한 냉소,
시가 많아지는 원인(특히 자본과 AI),
시 정신의 상실, 곧 민중적 혁명성의 소멸,
시가 지향해야 할 윤리와 그것을 실현해야 할 시인의 필요성 등이다.

특히 그는 말한다. “시 안에 역사 저항의 정신이 없는 참다운 지성 활동의 결핍이 곧 시의 풍요 속 결핍을 초래했다.”(41쪽) 또한 “시가 풍성한 시대에 역설적으로 삶의 의미는 헝클어져 버렸다.”(42쪽) 그의 말에는, 시가 넘쳐나는 오늘의 시대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그 시가 그려내야 할 꿈이 필요하다는 시의 존재 이유가 함축되어 있다.

정리하면, 황규관의 주장은 시대가 헝클어질수록 시인의 책임이 더 커진다는 데 모인다. 즉, 시인에게 자기 성찰과 시대를 관조하는 비판적 사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말하는 비판적 사유의 소유자가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시인간(詩人間)을 향해

우리의 대화와 황규관의 논문을 통해 나는 시인간을 상상한다. 시인간은 시를 통해 드러난 현실을 비판하고, 감춰진 결을 공부로 길어 올리며, 타인의 텍스트와 연대하여 책임의 언어를 실천하는 글쓰기의 주체다.


돌이켜보면, 시인간은 AI 시가 쏟아지는 오늘의 시대에 더욱 절실하다. 최근 박인의 시집 『외사랑』(2023)은 인간 시인과 독자 AI의 대화로 이루어졌다. 또한 인공지능 시인 시아(SiA)의 첫 시집 『시를 쓰는 이유』(2022)도 출판되었다. 이런 사례는 시가 더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런 현상은 시가 비판과 상상이 아니라 단순한 언어 조합의 산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불편한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시인간은 이런 시대에도 인간의 본질에서 멀어진 기계적 사유를 되살리고, 수많은 글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시의 언어로 길잡이가 된다. 사유를 기계에 내맡기거나 타인의 글을 방치하는 글쓰기는 우리가 길을 잃는 이유일지 모른다고 늘 경계한다. 또한 자기만의 사유로는 비판과 상상이 요원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글쓰기를 타인과 연대하는 일로 확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세계는 가장 크게 욕망하는 단 한 사람만 남겨질 위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요컨대 AI가 언어를 기계적 패턴에 따라 정확히 배열한다면, 시인은 자기 앞에 놓인 언어의 책임과 시의 맥락을 자유롭게 다듬어낸다.

시인간의 탄생은 함께 길을 잃지 않기 위한 문학적 전략이다. 길을 제대로 걷는 세계는 어른들만의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씽씽 달리며 즐겁게 뛰어놀 이 땅의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다. 이 무한한 글쓰기의 시대에 우리는 모두 타인과 연대하며 세계의 속살을 곧게 읽어내는 ‘시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서로, 쓴 글(시, 에세이, 소설 등)을 함께 읽으며 비판과 상상을 일깨워주는 작은 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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