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와 이토, 권남희 역 『츠바키 문구점』(ツバキ文具店, 2017)
-파편 같은 삶을 모아 손으로 글 조각보를 만들어주다.
소설의 처음에
저자는 독자에게 한 통의 손 편지를 보낸다.
계절이 이어지는 내내 주고받은 편지는
글을 통한 자기 치유 과정을 보여준다.
일본의 소설가 오가와 이토는 데뷔 10년 후인 2008년에서야 첫 소설을 출판했다. 이전에는 작사가로 생활했다. 그가 소설을 처음 발표했을 때 다룬 소재는 음식이었다. 아니 ‘요리’라 해야겠다. 『달팽이 식당』(食堂かたつむり,2008)을 시작으로『따뜻함을 드세요』(あつあつを召し上がれ, 2012)와 같은 소설들을 연이어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 소설과 소설이 출판되는 사이에 음식과 요리를 소재로 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토대로 다른 매체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해 왔다.
음식 전문 소설가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주제는 평이하다. 마치 치열한 과정을 거쳐 준비한 요리가 막상 식탁에 오르면 만든 사람은 진이 다 빠지는 것 같다.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해도 그 순간 늘 먹는 식탁 밑반찬같이 평가되는 것과 같다. 또한, ‘음식은 메뉴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먹는가가 중요하다.’라는 보편적 명언도 있다.
그러나 요리에 있어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요리방식이다. 그가 경험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재료로 삼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주제를 끌어내는 것은 작가가 가진 고유한 능력이라 할만하다. 특히 오가와 이토는 이런 능력이 탁월하다. 그에 손에서 평범하게 보이는 하나의 글감으로 다양한 요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마치 생선 한 마리를 앞에 두고 모임의 성격과 취향에 따라 생선찜을 할지, 구이를 할지, 회를 만들지를 판단하는 능력이 그에게 있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토의 글은 주제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요리했는지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그의 서술 기법에 다양한 변화가 적극 활용되었다.
우선 이 소설에서 작가는 새로운 소재를 사용했다. 음식에서 문구로 옮긴 것이다. 저자는 ‘츠바키 문구점엔 대필 손 편지가 있다.’라는 소식부터 타전한다. 손 편지 ‘대필(代筆)’을 재료로 요리한 것이다. 손 편지가 기계편지로 ‘오래전에’ 옮겨진 것을 참작하면 이 편지 쓰기는 과거이며 추억에 불과하다. 그러니 독자로서는 색다른 소재이면서도 철 지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을 오히려 새로운 사건으로 이끌어간다.
대필이라는 소재도 재밌지만, 문체 역시 단순하고 경쾌해서 읽는 재미가 있다. 이 책 몇 장을 넘기다 보면 문득 40~50년 전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분이라면, 종종 연애편지를 잘 써주는 친구가 떠오를 수도 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편지 대신 써주기는 더 세련되고 세밀한 묘사가 마구 쏟아진다. 대필가들은 으쓱해하고, 의뢰인은 크크 거린다. 물론 회신과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그 대필은 종종 손이 무뎌 머뭇머뭇하는 친구들의 숨을 트이게 하고 급기야 환하게 웃음 짓는 결론으로 이끌어주기도 했다. 대필은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는 힘이었다.
둘째, 계절의 배치다. 모두 6개의 꼭지로 구성된 이 소설에서 처음부터 네 번째 꼭지는 계절을 따라간다. 여름부터 봄으로 이어진다. 이런 계절도 배열도 소설가가 재료 다루는 솜씨라 할만하다. 이 소설이 여름을 출발로 삼은 것이 이채롭다. 이로써 상식적인 계절의 흐름은 달라졌다. 개인적으로 봄부터 시작하는 계절 구분은 거의 습관적이다. 여름이 내 이야기의 시작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가을부터, 겨울로부터도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나’는 여름을 시작으로 다음 해 봄을 맞는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여백을 남겨준다. 계절에 대한 회한과 글씨와 대필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곳곳에 떠올리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계절이 바뀌는 것은 사람이 성장하고 그 관계의 외연이 넓혀진다는 것을 함의한다. 계절의 변화를 따라 ‘나’는 ‘우리’가 되고, ‘나’는 ‘너’를 용납한다. 성장과 치유 그리고 성숙한 사람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편지를 주고받는 모든 과정에는 일본의 기본 정신인 ‘화(和)’가 깔린 듯하다. 저자는 이 ‘어울림’의 바탕에 ‘글씨’를 대입한 것이다. 이 글씨를 근간으로 독자들은 마치 컬러북 같은 밑그림을 따라 편지에 얽힌 자기 추억을 마음껏 채워 넣을 수 있다. 이 빈 그림틀에 자기 색연필로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칠할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 또 하나의 기법은 사실적 배경을 가상현실처럼 사용한 것이다. 이는 다섯 번째 꼭지인 번역자 후기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소설은 지명과 공간들을 실명으로 쓰고 있다. 번역자가 도쿄에서 열차로 55분 거리에 있는 가마쿠라로 곧바로 날아간 것도 무리는 아니다. 번역자는 이런 노력 끝에 이 소설이 마치 실제의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같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렇게 풀어쓴다. ‘그것을 보기 위해 그곳에 가면 그것이 있다.’
끝으로, 주목할 기법은 마지막 여섯 번째 꼭지에 있다. 이 단락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편지들을 실제 그대로 실어두었다. 쓰인 그대로 제본해 둔 것이다. 실물편지를 보면 내용을 보기도 전에 다양한 삶과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을 정도다. 이미지 그 자체로 소설을 현실로 되살려준다. 꼭 훑어봐야 한다.
정리하면, 이 소설이 글감을 다루는 방식은 대필이라는 익숙한 소재, 단순하고 경쾌한 문체, 계절의 혼용, 현실을 가상처럼 다루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다른 한 가지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른 특징은 손 편지에 대해 작가가 자기 관점을 드러내는 대목들이다. 아니 좀 더 명확히 말하면, ‘손편지 대필’이라는 지난 문화를 오늘 다시 대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그것을 별도로 써두지는 않는다. 다만 계절과 계절 사이,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사이에 드러나지 않는 표기로 방점을 찍어 배열해 두었을 뿐이다. 몇 개 예를 들면 이런 표현들이다.
첫째, 편지대필의 정의와 그 중요성에 대한 언급이다(인용된 지면은 따로 쓰지 않는다. 직접 이 글들을 읽어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편지는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함과 동시에 상대가 그것을 받아 들었을 때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씨는 그 사람과 함께 나이를 먹으며 늙어간다… 글씨도 나이와 함께 변화한다.”
(이 문장은 결국 이 소설이 드러내지 않으면서 지향하는 내적 주제라 할만하다.)
“글은 몸으로 써야 한다.”
“글은 남는 것이다. 상대가 그 편지를 읽고 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이 글보다 말을 선호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도 지금까지 글씨는 그 사람 자체라고 믿었다. 촌스러운 사람은 촌스러운 글씨를 쓰고, 섬세한 사람은 섬세한 글씨를 쓴다, 얼핏 꼼꼼하게 보여도 대담한 글씨를 쓰는 사람은 성격에도 그것이 나타난다… 그런 식으로 글씨에는 그것을 쓰는 사람의 인품이 그대로 배어 나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글씨’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투영한다. 그러니 문체가 그 사람이다.)
“당신은 늘 말했죠. 글씨란 인생 그 자체라고. 나는 아직 이런 글씨밖에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림없는 내 글씨입니다. 드디어 썼네요.” (완전한 글체는 없다. 온전해지려는 글체가 있을 뿐이다.)
이런 구절들에 의하면, 편지대필은 곧 그 사람의 이야기, 인생의 의미를 대신 써 주는 것이다. 아울러 편지대필의 자세는 받은 사람의 기분이 써 보낸 사람의 의지에 부합하게 해 주는 것이다. 이런 구절들은 마치 봄날 땅을 뚫고 올라올 씨앗처럼 심어져서 조금씩 싹을 틔우는 나무와 같다.
둘째, 작가는 대필자의 마음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편지에 담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작가는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이 표현은 ‘글’이 무엇이며, ‘글씨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개인 철학이 스며있다. 다시 말해 편지대필은 무엇보다 의뢰자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뢰자인 그가 수신자에게 썼을 법한 바로 그 글을 써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이 대목에 연관된다. 그는 마치 경건한 예식을 진행하는 것 같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이런 행위를 아름답다고 말한다. 동시에 이 말이 허툰 것이 되지 않도록 독자를 자연스럽게 이끌어간다. 공감해 주기를 억지로 고집하지 않는다. 이 점은 작가의 장점이다. ‘환대와 배려’를 눈에 보이도록 해 준다는 말이다. 가상으로 끝날 수 있는 이런 가치 행동을 실재하게 써낸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생각은 우주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라는 철학적 경구에 부합할 수도 있다. 화해와 평화라는 거대한 주제를 편지라는 지극히 평범한 옷으로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끝으로 한 가지를 덧붙여두고 싶다. 이 소설에서 가장 유의할 것은 빨리 읽지 않는 것이다. 물론 여느 일본 소설처럼 글의 흐름이 가볍다. 이런 책이기에 느릿하게 읽는 독법이 꼭 필요하다. 마치 자신이 대필가로서 글을 써야 할 사람처럼 말이다.
이런 느린 읽기를 추천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첫 문장이 소설을 견인한다는 주장이 있다. 나도 동의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덧붙여 마지막 문장이 소설을 완성하는 때도 있다고 말하려 한다. 그저 멋진 첫 문장과 끝 문장이 아니다. 두 문장이 적확하게, 발전적으로 호응하는 경우다. 소설 『츠바키 문구점』이야말로 그 좋은 예이다.
이 소설에서 처음과 마지막 문장을 다시 펼쳐보라.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나는 나지막한 산자락에 자리한 아담한 단층집에 살고 있다.”이다. 여름의 어느 날의 고요한 시작을 알린다. 마지막 문장은 “새들이 밤에 흔적을 쪼아 먹듯이 신난 목소리로 수다를 떨고 있다.”(314쪽)이다. 봄의 어느 날 한낮의 풍경인 듯하다. 고즈넉하면서 침잠하는 살림 풍경으로 시작하여, 생동하는 아침, 소리가 역동하는 분위기로 끝맺는다. 이 소설은 이 두 문장 사이에 ‘편지를 써 준다.’라는 다양한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배열했다. 이제 이 두 문장 사이에서 편지를 매개로 한 다양하게 얽힌 삶의 이야기가 발전적 서사로 채워진다.
이런 특징을 염두에 둔다면, 독자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자연스럽게 첫 장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문장 사이를 마디마디 채우는 조각 같은 편지글이 다시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읽을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소설 속 에피소드들은 조화롭다.
마침내 이 소설은 각 사람의 편지라는 다른 조각들이 형형색색으로 어우러진 듯하다. 파편 같은 천들이 작가의 손에서 잘 완성된 고유한 조각보로 다시 태어났다. 사람도 성숙하고, 나지막한 세계의 여름 언덕에 다시 봄이 돌아와 새소리로 역동한다. 가을에 읽기에 더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