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한병철의 『생각의 음조』 (디플롯, 2024
“철학이 예술을 만났을 때”
“그가 방의 정원사로 철학을 연주하는 것에서부터
길거리 노동자로 연주하는 새로운 곡도 듣고 싶다.”
책의 개요와 비평의 논지
한병철은 자신을 ‘정원사’로 부른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철학가일까? 2024년에 출간된 그의 강연집 『생각의 음조』 속에 그 답이 들어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가 ‘철학이라는 꽃을 음악처럼 다루는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는 그 예술을 철학의 말로 시연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그가 다른 책에서 말한 것을 빌리자면, 정원사로서 그는 시대의 요철 같은 삶의 나무를 ‘매끄럽게’ 다듬으려 한다. 그런 의지로 가득한 미학적 철학을 추구한다.
이미 알려져 있듯이, 『생각의 음조』는 한병철의 철학을 집약한다. 이 책은 그가 출간한 다른 책들과 달리 세 번에 걸친 강연으로 구성되었다. 옴니버스 형식에 가깝다. 책의 기획자 서문에 따르면, 이 강연은 2023년 4월 23일에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같은 해 4월 13일에는 포르투갈 북부 항구도시 포르투에서, 4월 11일에는 포르투갈 가톨릭대학교에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강연과 관련해서 저자 한병철 자신의 특별한 설명이 눈에 띈다. 그는 대체로, 피아노와 꽃을 강연장으로 옮기는 힘든 상황을 참작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세 번의 강연이 가능했던 것은 이런 요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점을 세 번의 강의마다 반복해서 언급한다. 이런 언급은 이 강연들이 기본적으로 이 세계의 어그러진 현실을 오히려 미학으로 사유하려는 저자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한병철 철학은 미학적 접근을 통해 희망을 지향한다.”라는 논지를 천착하려 한다. 이런 나의 주장은 이 책의 편집과 이 책의 핵심 내용을 통해 입증된다.
책의 편집(1):강연의 배열
이런 의지는 우선 책의 편집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 특징을 다음 두 가지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우선 강연의 재배열이다. 순서상 가장 늦은 강연, “생각의 음조(La Tonalidad del Pensamiento)”를 맨 앞에 두었다. 이 강연을 번역본에서도 그대로 책 제목으로 삼았다. 이어지는 ‘에로스의 종말’은 이미 2013년에 단행본으로 나왔던 것을 축약해서 강연한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희망의 정신’은 가장 최근 2024년에 독일어 초판으로 나왔다. 강연과 책의 출판이 그리 시간 간격이 크지 않아 보인다.
어쨌든 이런 편집을 고려하면, 적어도 이 책은 한병철이 그동안 천착해온 다양한 주제들의 흐름을 잘 요약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생각의 관조’는 그의 사유의 배경, 또는 기본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이어서 ‘에로스의 종말’은 그가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현대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 물질과 비접촉의 문제를 부각한다. 아마도 이것이 그의 사유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 제기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희망의 정신’은 두 가지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한다. 하나는 그동안 출판된 저서들의 비관적 정서를 일신하려는 것이다. 이른바 자기 철학이 기조에 대한 변명의 성격이 짙다. 다른 하나는 그 기조 변화의 궁극적 지향점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희망의 정신’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책의 내용에 비춰보면 ‘정신(Geist)’이라는 말이 본연의 의미를 다 담아내기에는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희망이라는 정신’ 또는 ‘희망의 영’이라는 의미가 더 부합하지 않을까 한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 책에서 ‘불안’이라는 키워드를 톺아냈다. 하지만, 나는 이 점도 아쉽다. 아마도 저자가 예전에 서술한 ‘피로 사회’와의 연속성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이 ‘희망의 정신’이라는 주제를 오히려 약화한다. ‘불안사회’라는 번역은 저자의 본래 의도를 흐리며, 오히려 ‘희망의 영’이 강조되어야 한다. 저자는 ‘불안사회’를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희망의 영’이 우리를 향도한다는 것을 조준했다. 이 책은 ‘불안사회’에 대한 규명이 아니다(158쪽). 책의 부제처럼 ‘불안사회에 대항하려’는 것이다. 희망과 불안을 대조항으로 삼을 때, ‘불안사회’라는 관점은 오히려 이 책의 반대 측면을 강화할 위험이 있어 보인다. 이 세 번째 글의 중요성은 한병철 철학이 지향하는 바가 ‘희망’이라는 것을 명시한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이 책은 음악이라는 방법론에서 시작해, 타자의 회복을 주제로 사유를 전개하고, 마침내 희망의 정신이 인도하는 세계로 나가는 철학적 여정을 드러낸다. 하나 덧붙일 것은 이 책은 강연내용을 옮겼다는 점에서 그의 ‘말’이 기존 글보다 훨씬 시적 함축이 자연스럽게 살아나고 언어 단절로 인한 난독 현상이 대부분 해소되었다는 점이다. 번역이 매끄러워 가독성이 좋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형식(강연 배열)과 시각적 장치(사진과 색채) 모두가 희망 철학을 드러낸다
책의 편집(2): 사진과 색
이 책의 편집과 관련해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있다. 강연 사이 사이에 삽입된 사진과 책 전체를 주도하는 검은색이다. 특히 검은색은 흰 꽃과 대비되어 더욱 도드라진다.
중요한 장면만 몇 개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책 본문 첫 페이지다. 여기에는 검은색 바탕에 세 번에 걸친 강연의 한 장면을 차례대로 실었다. 피아노는 보이지 않고(곡은 연주되고 있었다) 책상과 꽃, 그리고 물과 창이 주요 미장센(Mise-en-Scène)이다. 각 장면이 의도하려는 바는 쉽게 판단할 수 없지만, 추론해 본다면, 첫 번째 사진은 꽃이라는 매개를 통한 사유의 출발을 아르지오로 들려주는 것 같다. 두 번째 사진은 손의 움직임을 포착해서 그가 말하는 ‘에로스의 종말’을 물과 손의 움직임으로 상징하는 듯하다. 에로스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접촉의 소멸과 직접 관련 있다. 일어나는, 가까이하지 않으면서도 가까워지는 접촉의 관계성을 들려주려는 것 같다. 마지막 장면은 희망이 창 너머 빛처럼 자신을 조명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은 세 번째 글 ‘희망의 정신’에서 볼 수 있다(146~147쪽). 여기에는 모두 네 장의 사진이 검은색을 배경으로 실렸다. 앞선 장면들이 앉아 있던 것에 비해 강연자는 일어서있다. 그리고 창과 성당을 배경으로 강연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이 대목은 그가 ‘희망의 정의’를 추론하는 과정과 잇대어 있다. 예를 들어 “희망은 앞을 바라봅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이성이나 이해로는 닿을 수 없는 행동력과 예견력을 갖게 해준다.”(148~149쪽)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이어 읽어보면, “희망은 미래의 지평선에서 동트듯 떠오르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첨예하게 만들어줍니다. 희망은 새로운 것이 태어나게 돕는 산파와 같습니다.”
이 설명에서 중요하게 읽히는 대목은 바로 ‘희망’에 대한 저자의 이해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어떤 빛이고, 태어나는 무엇인가를 돕는 역할을 한다는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말 속에서 ‘희망’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추동력’이며, ‘지지력’일 수 있다. 여기에서 선별된 사진이 창을 배경으로 하는 이유도 그런 점을 부각한다. 창은 빛이 스며들고, 나의 시선이 멀리 나아가게 하는 프레임(틀)이라는 점에서 희망이라는 말과 어렵지 않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이 책의 편집은 글과 사진을 효과적으로 배열하여 다분히 강연 주제를 시각적으로 이미지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은 많은 것을 함축하면서, 그 틀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주목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이로써 이 책은 책의 편집과 사진이라는 틀을 사용하여 한병철의 사상을 함축하게 독자를 그 틀로 안내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책의 통합주제
저자에 말에 의존하면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하나는 ‘타자의 소멸’이고, 다른 하나는 ‘상실된 희망의 복구’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에로스의 종말’에서, 희망의 복구에 관해서는 ‘희망의 정신’에서 다뤄진다. 이 주제들은 저자가 평소 천착해 온 다양한 저서들과 연동한다. 책 대부분에서 그는 현대 사회의 병폐를 철학의 눈으로 조망하려는 의지를 반영해왔다. 저자는 이런 철학 주제를 그저 설명하지 않는다. ‘생각의 관조’에서 저자는 자신의 철학을 떠받치는 ‘밑-음’에 관해 설명해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날개’다(28쪽). 그의 말을 정리하면, 날개란 둘을 상징한다. ‘그랜드 피아노 그것에 파생하는 ‘음악’이다.
따라서 저자의 모든 사유는 이 두 날개짓에 의한 결과다. 이 강연들이 세부 주제와 강연 대상이 모두 다르지만, 시종일관 이 두 요소가 강조되는 이유도 명확해진다. 그 이유 역시 대체로 두 가지다. 첫째, 불안과 좌절에 천착한 자기 철학이 마치 곡 연주와 같이 기본곡조를 토대로 다양하게 변주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여러 저서를 통해 드러난 그의 철학 주제는 단순 반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주조음을 유지한 변주곡이라는 것이다. 둘째, 희망복구라는 자기 철학의 확장이다. 음악은 그 자체로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가 슈만의 ‘시인의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안단테 에스프레시보(느리게, 풍부하게, 감정적으로)를 말하면서 이를 ‘밝은 슬픔’이라고 말한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35쪽).
이는 그가 천착하는 철학이 ‘어둠과 빛의 조화’이며 궁극적으로 ‘밝은 방’을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는 처음부터 ‘희망을 상상하는 철학’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사유의 흐름이 세 번째 강연인 ‘희망’을 향한 인식 투쟁이며, 그의 실제 강연에서 생각의 관조보다 먼저 말해진 주제다. 그가 ‘생각의 음조’ 끝에서 인용한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시 <소나무 숲에 내리는 비>를 보면, 그의 사유와 관련해서 몇 개의 핵심 단어를 읽을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숲의 문턱,’ ‘새로운 말,’‘우리의 얼굴,’‘비,’‘순수한 생각,’‘아름다운 동화’로 꼽는다. 이 단어들을 보면,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주제는 형이상학적 이상에 닿아있기보다, 이 세계, 사람의 손으로 어루만져, 그 아름다운 모순을 매끄럽게 다듬어내는 땅의 예찬에 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이 책은 한병철이 철학 예술가로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예술적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입증했다. 우선 강연순서의 편집 구성이 그렇고, 두 날개로 상징되는 피아노와 연주되는 곡, 덧붙여 다양한 꽃도 미장센으로 효과적이었다. 끝으로 번역가의 말처럼 이 책은 하나의 ‘아리아’ 연주를 듣는 것 같이 전개되는 글이다. 가볍게 보더라도 이전 책들에 비한다면, 이 책은 그의 사유가 글보다는 말로 더 예술적으로 유연하게 전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의 의의
이 책의 의의는 주제서술과 관련되어 있다. 이 점은 번역가의 후기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 책이 예술적으로 즐겁다’라고 일갈한다. 나아가 이 책이 마치 아리아 같은 음악으로 자기 철학을 변주하면서 동시에 ‘그림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평가했다(180면). 이 책의 의의가 다분히 철학을 예술로 표현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다른 의의는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한결같은 철학 주제가 잘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기존 저서들처럼 당대 현실을 철학으로 비평하고 냉철하게 조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손안에 들린 작은 생활 도구에 불과한 스마트폰이 인간 세계를 장악한 상황에 대해 좌절할 만큼 심각한 우려를 감추지 않는다. 이런 사유의 흐름에서 세 번에 걸친 강연은 두 가지 요소를 그 원인으로 확정한다. 하나는 타자소멸이고, 다른 하나는 에로스 상실이다.
둘째, 새로운 철학 주제를 부각했다는 점이다. 바로 세 번째 장에서 말하는 ‘희망의 정신’이다. 같은 제목의 단행본보다 더 대중적인 언어로 그는 ‘희망’을 재정의한다. 바츨라프 하벨을 인용하며 ‘희망은 정신가 마음의 방향’이라 확언한다(140면). 이어서 ‘희망은 앞으로 몸을 굽힘으로써 더 멀리, 더 정확히 보려고 하는 전망’이라고 덧붙인다. (160면) 희망이라는 관점에서 자기 철학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으며, 사유하는 삶은 절대적으로 필요해진다는 견해를 흔들림 없이 밝힌다.
셋째, 철학시의 가치를 되짚어주었다는 점이다. 이 강연집에서 “생각의 관조”가 맨 앞에 편집된 것도 이런 의미에 부합한다. 그는 철학 옆에 음악을 두고, 음악이 철학 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 음악의 철학 앞에서 그는 시를 읊는다. 이제 철학 안에 상상력이 깃든다. 리처드 로티가 주장한 대로 철학에 시의 상상력을 허용하는 ‘철학시’가 현현하는 순간이다. ‘시로서의 철학’을 구현하듯, 그의 철학이 강연 되는 공간은 책 전체를 흑백사진으로 배열하여 어둠 속의 빛,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가득 찬 방을 연출했다. 이런 장면은 그가 어둠과 밝음의 대조를 음악의 음조처럼 이해하며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담은 철학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나아가 그의 희망은 진정한 접촉을 상실하여 가까이 있으면서도 거리를 상실한 시대, 즉 손의 접촉을 빼앗긴 시대, 기계에 빼앗긴 시대에 진정한 에로스를 복구할 것을 촉구한다.
정리하면, 그의 책은 각각 다른 장소에서 강연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회복과 희망의 확고한 갱신을 일관되게 주장한다. 이로써 그는 희망이 사라질 것 같은 시대변화에도 여전히 유지되어야 할 희망에 대한 노래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아름다움은 모순’(24면) 이겠지만, 희망만큼은 아름다우면서 일관된 음조로 코다(되돌아가는 반복 연주)에 적합하다. 그가 철학을 음악과 꽃과 시를 앞에 두고 희망을 논했기에 가능한 주장이다.
책의 한계
이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제는 여전히 한계가 남는다. 특히 그의 희망론이 그렇다. 개인적으로 그의 ‘희망의 정신’에서 보여주는 희망론은 그 탁월한 사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보 위를 벗어나지 않고 반복한다는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론과 견줬을 때 그렇다. 그의 희망을 정신을 집약하는 주장은 책의 마지막에 제시도니 파울 첼란의 시의 한 구절을 다시 인용한다.
별은
여전히 빛난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이 시는 그가 희망을 ‘불가능함’과 ‘그런데도’라는 믿음의 행위 사이의 긴장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다. 희망이 별처럼 빛나는 세계에서는 결국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 내재한 정서는 얼핏 희망의 자기 유지를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희망이 어떤 일의 추진력이면서 동시에 자기 유지라는 것을 어떻게 조화시킬지가 새로운 문제일 수 있다. 이런 뒤엉킨 특징은 블로흐가 ‘희망이 저항성으로 유지된다.’라는 것에 견준다면 다소 현실로부터 비켜난 것 같다. 한병철의 주장은 여전히 야생과 자연이라는 현실로 이식되기 어려운 정원의 꽃으로 남아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병철이 ‘희망은 죽음 너머의 존재여서 죽음에의 선구가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170면)이라고 말하면서 희망을 ‘우울’의 대항마로 말했을 때조차 그 나아감, 돌진은 곧 인식 너머 몸의 항진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아쉬움이 여전하다. 다시 말해 그의 항상성은 사유에 관한 것이지 현실을 향도하는 힘으로는 작동하지 못하는 것 같다. 바로 이 점에서 ‘희망의 추동력’이라는 말은 여전히 불안하다.
결과적으로 나는 불안한 사회가 바로 이 희망의 정신이 정원의 꽃처럼 향기로만 남겨졌을 때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유 현상은 그가 ‘변주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물론 여느 책들처럼 철학이 사유의 전유물로서 시대를 진단하기에는 적절하다. 하지만, 그것이 스마트폰 제조를 멈추게 할 사회적 정치적 윤리로 나아가야 할지는 여전히 질문을 남긴다. 비록 나의 견해가, 그의 철학에 대해 아직 이해가 미미하고 시대의 선입견을 그대로 추종한다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철학이 열어놓은 공간에서 나는 ‘검은 안식’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모색할 학문적 단서를 얻었다.
희망의 추동력을 위한 제언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가 ‘희망의 정신’을 논하고, 그것이 삶의 추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이제 나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가 제안한 이 희망의 정신에 기반하여 그 외연을 좀 더 확장해 보려 한다. 나는 그의 희망론이 놓친 삶의 구체성을 ‘검은 안식’이라는 이름으로 보완하려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 책이 지향하는 바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한병철의 주장에서, 특히 에로스의 종말과 희망의 정신에서, 특히 그가 희망에 대해 “앞으로 몸을 굽힘으로써 더 멀리 더 정확히 보려고 하는 것, 먼 곳을 바라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164쪽)이라고 정의한 것에서 ‘검은 안식’이라는 개념을 포착한다. 이 말은 나의 새로운 개념이다. 정리하면,
“‘검은 안식’은 단순한 물리적 휴식이나 멈춤이 아니라, 자기 성찰과 존재적 재정의를 위한 실천적 행위이자 철학이다. 이는 “어둠 속 빛의 철학”이며, “반질서적 질서의 공간”이다. 불확실성 속에서 믿음을 ‘믿으려는 의지’로 재규정하고, 삶의 질서를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방식(modus vivendi)을 찾아가는 반(反) 도피적 여정”이다.
이 검은 안식은 한병철의 ‘밝은 방’의 개념을 좀 더 현실적인 삶의 문제로 끌어내린 것이다. 우리 사회는 누구도 ‘검은’으로 상징되는 고통을 벗어나기 어렵다. 즉 ‘타자의 소멸’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희망의 추동력은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희망은 ‘안식’에서 온다. 특히 검은 안식은 삶의 방식을 이 현실 속으로 더욱 깊이 밀어 넣는 것이다. 이 안식의 구체적인 행위가 있다. 바로 걷기다. 정원을 거닐고, 정원 밖으로 나와 숲의 길을 걷는 것이다. 몸의 완전한 소진까지 도시의 광장과 숲길을 걷는다. 그 길에서 만나는 것들과 상호 관계성을 확인한다. 나만의 예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이 검은 안식은 숲의 작은 풀과 거대한 나무의 조화, 세계의 평화가 곧 나의 평안이라는 미분적 실천을 함양하는 윤리의 실천이다. 이런 미분이 적분 되어 거대한 세계 윤리를 추동한다는 것이다. 곧 나의 발밑이 세계인 것이다. 이는 한병철이 그의 다른 책 『관조하는 삶』(김영사, 2022)에서 말했던 무위가 직접 나의 몸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꽃피기를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론-길거리 연주로 듣는 철학
정리하면, 우리 세계에 대해 철학으로 거대한 세계를 보는 것에 한병철의 역할은 지대하다. 하지만 그의 철학이 세계의 작은 현상들을 통해 철학을 조망하는 것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의 철학이 오늘날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결국, 이 현실에서 비켜나 피아노와 꽃의 세계로 환원하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철학의 한 날개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철학에서 첫 번째 날개인 그랜드 피아노는 여러 종류로 잘 구비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날개인 연주곡이 언제나 바흐나 슈만류의 것일 수 있을까? 세계에는 숱한 결이 있고, 특히 음악은 셀 수 없이 다양하지 않은가. 그가 방의 정원사로 철학을 연주하는 것에서부터 길거리 노동자로 연주하는 새로운 곡도 듣고 싶은 마음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