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我)라는
타자의 아픔에 스며들다

by 푸른킴

여름이 갔다. 더위는 무기 같았고, 우리는 손쓸 수 없이 버텨야 했다. 단지 기후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인간은 자기 한계를 직면하지 않으려 하고, 때로 타인의 삶을 희생해 자신의 안녕을 도모하면서도 반성하지 않는다. 각자는 자기만의 성(城)을 높이 쌓되, 그늘은 내어주지 않는다. 이는 정치적 자아의 탈선이지 않을까.


올해 나는 전국시대 도가 사상가 장자(莊子, 장주)에 관한 논문들을 읽었다. 입문에 불과하지만, 그 사유는 ‘타자-나’의 경계 너머를 조망하도록 돕는다. 특히 배운 것은 ‘멈춤’의 유익이다. 세계와 타자 앞에 서서 먼저 멈춘다는 것은, 내 삶의 표피를 뚫고 본질로 파고드는 내적 힘을 얻는 일이다. 멈춤은 정지가 아니라 더 깊고 높은 차원으로 전진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나는 멈춤을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하는 세 개념에 주목했다. 자쾌(自快), 자화(自化), 찰기시(察基始)다. 자쾌는 스스로의 기쁨, 자화는 자신됨의 성취, 찰기시는 현상에 함몰되지 않고 ‘기시(基始)’—근원과 시작—을 살피는 성찰이다. 이 셋은 서로 다른 언어처럼 보이나, 결국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하나의 큰 흐름으로 모인다. 무위자연은 삶을 억지의 틀에 가두지 않고, 경계를 넘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려는 태도다. 인간은 틀 밖으로 걸어 나갈 때 자유롭다. 그 길에서 우리는 때로 멈추고 때로 전진하며, 자기 해체를 감내한다. 이 해체는 현실도피가 아니다. 나는 데리다를 따라 해체를 파괴가 아니라 분해와 재구성으로 이해한다. 곧 표면이 아닌 뿌리, 인간 본성을 관찰하는 실천적 관조이며, 이 지혜 아래 자쾌·자화·찰기시가 서로를 견인한다.


이러한 멈춤의 지혜는 두 힘을 낳는다. 첫째, 유한성의 인식—자기 한계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힘. 둘째, 초월의 용기—그 한계를 넘어서는 추동력. 이 밑힘은 자기 틀을 해체하게 하고, 세계와 관계 맺게 하며, 그 속을 소요유(逍遙游) 하도록 이끈다. 나아가 무위 속에서도 자기 기쁨을 발견하게 한다. 여기서 나는 신학적 함의를 본다. 피조물인 인간은 피조 세계에만 갇힌 존재가 아니라, 그 너머 창조자의 깊은 마음을 성찰할 수 있는 존재다.


한편, 나는 신학의 관점에서 오래 자계(自界)—스스로 설정한 경계—를 성찰해 왔다. 장자의 통찰은 삶이 무형의 진리에 근거함을 일깨웠고, 자유로운 삶에서 경계는 무의미하다는 확신을 새로이 했다. 다만 자계는 장자의 개념이 아니라 나의 신학적 반성 개념이다. 누구나 자기 경계를 설정하며, 그로 인해 자기를 가두기 쉽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자계를 식별하고 해체하려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 반성에 기대어 장자의 세 요소를 신학적으로 적용해본다. 첫째, 자쾌. 우리는 즐거움을 외부에만 기대는 유대(有待)에 머물곤 한다. 그러나 신학은 무대(無待)—오직 하나님께 기대는 존재 방식—를 가르친다. 이는 인간을 수동적 타율로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은총에의 의존이 인간을 가장 깊은 자유로 부른다는 뜻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관계적 존재이지만, 궁극의 기쁨은 타자 속에서 발견되는 자기의 ‘하나님 의존적 기쁨’이다. 둘째, 자화. 우리는 정체성이 시간·관계·소명에 따라 변화(물화,동화動化)할 수 있음을 잊는다. 장자의 곤과 대붕, 호접몽은 정체성의 가역성과 개방성을 일깨운다. 셋째, 찰기시. 표면과 결과에 집착하는 습관은 근원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근원을 잃으면 정체성은 퇴색하고, 자유의 길도 잃는다.


여기서 오상아(吾喪我)—‘내가 나를 장사 지낸다.’—가 필요해진다. 장자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곡이 아니라 노래를 택했다. 그는 가시적 슬픔에 머물지 않고 생명의 근원을 응시했다. 오상아는 자아집착을 장사 지내고 근원의 자유를 회복하는 각성이다. 이때 성찰은 나를 넘어 세계와 타자와의 조화로 열린다. 나는 표상에 함몰되지 않고 근원(基始)을 현미경처럼 세심하게 탐색하려 한다. 그 작업이야말로 경계를 넘어 타자에게 스며드는 자기 몸의 실험이다.


이 성찰은 히브리적 사유와도 만난다. 코헬렛은 인간이 흙—아파르—으로 돌아가는 운명을 받아들일 때 오히려 참된 자유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는 무대(無待)의 태도, 곧 은총에의 의존에서 솟는다. 이는 인간이 신에 종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은총에 힘입어 하나님의 세계로 유영하도록 부름 받았음을 뜻한다. 땅의 그 무엇에도 최종 의탁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을 기투(企投)할 때, 우리는 자유의 호수를 헤엄치는 존재가 된다.


이 성찰을 프락시스로 체화하기 위해 나는 길을 걷는다. 숲과 산, 바다와 호수, 도시의 길을 침묵으로 걷는다. 가능하다면 멀고, 낯설고, 위험한 초행길을 오래 걷는다. 육체의 피로는 곧 한계 인식이며, 멈춤의 계기다. 멈춤 속에서 질문이 들린다. “나의 삶은 이 시대에 왜 필요한가?” 나는 답한다. “나의 삶은 흙으로 귀환할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아파르의 본성을 일깨우기 위해 주어졌다.” 곧 나(我)는 나(己)에게, 결실보다 앞서는 근원의 탐구를 명하는 존재다.


이런 뜻에서 인간은 찰기시의 사명자여야 한다. 우리는 흙으로 돌아가는 물화의 존재임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지적 수양을 이어가야 한다. 장자의 언어로 말하면, 나(吾)는 변화를 피해갈 수 없는 피조물이다. 나(我)는 결코 나(己)에 갇혀서는 안 된다. 자기를 가두는 틀을 넘어 경계를 해체하며 자유로 전진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삶은 소요유—더 멀리, 더 오래, 경계를 넘어 걷는 자유—여야 한다. 걷는 동안 나는 더 자주 물화(=동화)를 경험해야 하고, 그 경험의 두께를 키워야 한다. 그러나 소요유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코헬렛이 말하듯, 모든 삶은 최후에 선악의 심판 앞에 선다. 장자와 코헬렛은 다르되 접점을 갖는다. 그들은 인간의 삶을 무위로 이끌어가는 자유와 책임, 초월과 심판이라는 긴장 속에 함께 선다.


요컨대, 멈춤은 삶을 꽃피우는 능력이다. 자쾌, 자화, 찰기시라는 뿌리를 내릴 때, 그 나무는 세계와 타자의 아픔 속으로 더 깊이 스며든다. 멈춤은 지나온 길을 성찰하게 하고, 타자의 고통을 주목하게 한다. 우리는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지만, 바로 그 운명 속에서 타자와 조화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멈춤의 지혜는 철학적 통찰을 넘어 신학적 실천의 토대다. 세계와 타자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근원을 탐구하는 삶—그것이 인간다운 삶이며, 내가 걸어야 할 소요유 여정이다.


가을이 왔다.

올 한 해의 길을 잠깐 멈추어 돌아보자. 세계와 나라는 타자, 더 나아가 너라는 낯선 타자의 아픔 하나라도 눈여겨보았다면, 우리는 이미 꽤 잘 걸어온 것이다.

keyword
화, 목, 일 연재
이전 05화하이퍼 자기 저항, 자기 변혁의 시대를 향하여